아들 따라 남고에 가다

[차오르는말들]

남고를 처음 가봤다. 생후 40년 만에. 운동장에는 푸르딩딩한 수박색 추리닝을 입은 남학생들이 공을 차고 있다. 인조잔디가 깔리지 않은 흙바닥에 구름먼지가 인다. 전봇대만한 아이들의 그림자가 뒤엉킨다. 완전 어른이구나. 남고가 꼭 군대같다고 생각한다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강당으로 간다. 넓은 공간이 꽉 찼다. 평일 오후인데 양복차림 남자가 많다. ‘요즘은 아빠가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다더니 이런 자리에도 온단 말인가새삼스럽다. 스크린이 내려오고 복잡한 도표와 통계치를 내민 입시현황을 보고한다. 서연고 정원이 몇 명 인서울 이과 문과 정원이 각각 몇 명. 그래서 우리학교 전교에서 몇 명이 서울소재 대학을 진학한다는 말씀이다. “이과는 2.5등급까지 경기권 대학에 들어갑니다. 문과보단 훨씬 나은 편이죠.” 

지난 겨울방학 때 동네학원에 갔다가 들었던 얘기다. 충격은 덜하다. 다만, 고등학교 진학부장과 대형학원 입시실장이 판박이처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놀랍다. 강당에서 교실로 이동했다. 책상만 덩그마니 놓였다. 휑하고 퀘퀘하다. “아우~ 니네 교실에서 홀아비냄새나~” 어떤 엄마가 아들에게 전화해서 코맹맹이 소리로 따진다. 담임선생님 인사와 면담까지 마치고 나자 6시다. 무려 네 시간을 머물렀다. 공포영화처럼 서늘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잔인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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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아들

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올드걸의시집]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
,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
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여
,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
림자 같은 슬픈 女子
.



-
오규원 시집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목이 말랐다. 아침부터. 시를 안 읽었다. 일주일 동안. 공친 느낌. 잘 못 살았다는 자책. 더 바쁠 때도 시를 읽었는데, 내가 지금 시 한편 생각나지 않을 만큼 살만한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닌데. 밀린 적금 붓듯이 한꺼번에 일시납 해버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시집을 곧장 꺼내지 않기로 한다. 아름다운 글 한 편 수배한다.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폈다. <병과 인내심> 분량과 내용 모두 맞춤한 소품이다. 식탁으로 갔다. 등 뒤가 따땃하다. 남동향이라 아침이면 해가 푸지게 든다. ‘누군가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는 훗날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여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 여인이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였다이 순간 나는 기다리고 싶다. 누군가의 가슴으로 직진하는 여인이 되지 못하고, 기다리는 자리를 탐낸다. 기다림이 속편하다. 적당한 쓸쓸함. 적당한 초조감. 시간이 팽팽히 펴지는 그 순간이 좋다. 커피머신이 기적소리처럼 요란한 음향효과를 내며 떤다. 아침의 고요, 커피의 낙하, 언어의 친절이 급진적인 시적경험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는 행복하다.

김치찌개 한 솥이랑 단호박 부침 달랑 놓고 저녁 먹는 자리. 기타가 화제다. 왕년에 다들 조금씩 쳐봤다는 사실에 놀란다. 특히 박나 잘 놀았어. 롤라장도 갔다. 유행이었지. . 뒤로가기. 전영록의 불티가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노래방에도 가고. 고등학생 땐 미팅하고 고수부지 가서 헌팅하고. 완전 날날이었네. 공부도 했어그게 고딩 문화였어. 디스코텍에도 갔고, 난 온갖 통속문화는 다 즐겼다. 대학가선 운동했지. 맞네. 80년대는 운동권이 대유행이었으니 그야말로 통속이네. 서강대 앞에 운동권들 가는 술집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지하에 아주 컸어. 밤새 투쟁가 부르고. ? 우산속? 우산속은 또 뭐야. 완전 제목 오글거린다. 우산속에서 뭘 어쩐다는 거야. 웅성웅성. 아 맞다. 우산속은 술집이 아니라 디스코텍이구나. 그녀가 끼어든다. 나는 나이트클럽 세대에요. 홍대앞 발전소 다녔어요. 우산속과 발전소가 마주보고 웃는다. 접시위에 단호박도 반달눈으로 스마일. 시큼털털한 수다를 마치고 매혹적인 '바깥에서'를 읽고  돌아오는 밤길. 문득 아주 통속적인 시가 읽고프다. 오규원의 한잎의 여자 같은. 벤야민의 여인과 오규원의 여자. 아름다운 언어가 낳은 두 여자.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詩集 같은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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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만남의 최전선

[글쓰기의 최전선]


글쓰기 수업을 두 번 마쳤다. 그 사이 시아버님이 일과성뇌허혈로 쓰러졌다가 열흘 만에 퇴원했다. 뇌경색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마비는 없다. 가슴이 철렁했다. 존재를 고민했다. 며느리라고 해서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병원 몇 번 드나드는 것쯤이야. 헌데 그냥 서글펐다. 나는 기차시간표처럼은 살 수 없는 인생인 거 같아서다. 예외상태가 정상상태인 그런 삶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잔잔하다가 휩쓸리다가 가라앉다가 떠내려간다. 바다가 집이다 

글쓰기 수업은 재밌다. 사람 만나는 일은 비슷한가 보다집단 인터뷰하는 느낌이다. 귀 쫑긋. 토끼처럼 듣고 참새처럼 떠들고 애인처럼 교감한다. 에너지가 엄청 쓰인다. 일 하는 동안은 즐겁지만 끝나면 봉인이 풀리는 듯 피로가 확 몰려오는 증상까지 인터뷰랑 똑같다   

첫 시간엔 인사를 나눴다. 나를 포함한 26명이 글쓰기깃발 아래 모였다. 고등학생, 대학생, 휴학생, 취업준비생, 회사원, 교사, 당직자, 활동가, 백수, 육아휴직자, 예비작가 등 다양한 세상살이꾼들. 왜 글을 잘 쓰고 싶고 어떤 글을 쓰려는 건지 터놓았다. 크게 두 부류다. 생활글과 창작글. 앞의 경우는 블로그, 졸업논문, 영화감상, 성명서 작성, 회사공문 등 일상에서 글쓰기 필요성을 느낀 부류이다. 나머지는 여행작가, 동화작가, SF소설가 등을 꿈꿨다. 자기소개로 두어 시간을 보냈다. 하나같이 달변이다. 글빨은 난감하고 말빨은 되나보다. 코미디영화처럼 5분 단위로 관객을 웃겼다.

가수 이소라 씨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내 노래를 들을 땐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수학의 재미를 알려주는 책 한권 쓰고 싶어요.” “잘 살기 위해서 글 쓰고 싶어요. 잘 사는 게 뭔지 모르지만 나의 언어로 말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삶이 똑같은 패턴 똑같은 사람이라 여행을 가도 새로움이 없어요. 재미없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가슴을 때리는 글 쓰고 싶어요.” “솔직해지고 싶고 날아오르고 싶어요.” “휘발되어버리는 감정들 정리하고 싶어요.”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러워요. 머릿속이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어떤 사람들일까 구경해보자는 맘으로 왔어요.” “연애랑 비슷해요. 여자 친구 만나기 전엔 계획을 세우지만 그대로 안 되는데 글쓰기도 그런 것 같아요.” 

삶의 풍요를 꿈꾸는 자들. 그들에게 노동자이면서 작가로 법률가로 운동가로 누구보다 풍요롭게 살았던 <전태일 평전>을 읽고 글을 써오라 했다. 책 리뷰가 아니다. 전태일이 사유의 절정기를 맞던 나이 스무 살 때 내게 일어난 사건, 즉 삶의 최전선에서 세상과 부딪혔던 한 순간을 구체적으로 쉽게 줄거리 위주로쓰기다. 이는 '글과 삶의 거리'를 좁히려는 목적이다. 내 말은 없고 남의 말로 잰 체하는 글을 쓰면 글과 삶이 따로 논다. 꼭 자기 경험에서 출발할 것을 당부했다. 글쓰기란 자기 삶의 텃밭에서 자기 언어를 길러내는 일임을 <전태일 평전>만큼 잘 보여주는 책이 또 있을까 

첫 수업 후, 솔직하고 정성스런 후기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저항하는 글쓰기'라는 한솔씨의 결의가 좋았고 정민씨의 고백이 감격스럽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토록 벅찼던 것은 내가 작가가 되기위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사실 보다도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벌써 전달이 된 걸까. 함께-있음의 자각은 글쓰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내가 나누고싶어 욕심낸 그것이다.   

2
차시. <전태일 평전>을 중심으로 글쓰기 기법을 배웠다. 글쓰기의 동력은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전태일 평전> 나의 밑줄을 발표했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솔이씨가 낭독했다. 나도 밑줄을 그은 부분이다.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랐다 얼마나 시적인가! 직장인 귀선씨는 조영래변호사의 글을 꼽았다. 기성세대의 비굴한 처세철학을 비판하는 부분이 현재 본인이 직장에서 겪는 고민과 일치한다며 격하게 공감했다. 길지만 인용해 보면,

흔히들 아무개는 군대에 갔다 오더니사람이 다 되어서 왔다고 하는 말들을 한다. 군대가 사람 만드는 곳이다. 군대에 갔다 오면 사회에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우리가 수없이 듣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저한 상명하복...어떤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명령이라도 아무 이의 없이 지켜야만 하는 숨 막히는 계급사회, 인간적인 존엄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호령과 기합과 빳다방망이의 세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뼛속 깊이 깨달아 겸손(?)해진 인간,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거나 이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달걀로 바윗덩어리를 치는일인가를 철저히 터득하여 온순해진 자각 있는(?) 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군대로부터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노예의 처세술이다. 예속된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 노예는 자신의 영리함 때문에 평생을 노예로 산다고 니체가 비판했는데, 저런 사람들 회사에 참 많다. 가장 처량한 인간상이다. 출세해도 노예는 노예니까, 부유해도 노예는 노예니까 그렇다. 어느 봄날 토요일 오후 네 시, 전태일과 조영래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고귀함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실험알라딘에서 <전태일 평전> 리뷰 다섯 편 뽑았다. 어떤 글이 잘 읽히는가 물었다. 두 가지로 좁혀졌다. 친구의 경험을 예로 든 글과전태일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고유한 해석이 담긴 글이다. 전태일과 외로움을 화두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나머지 세 편의 예시글은 전태일은 어두운 노동현실을 밝힌 시대의 횃불이었다는 일반론을 재탕했다. “아마 <전태일 평전> 읽고 글 써오라고 했으면 우리중에도 이런 글을 여러 개 나왔을 걸요.” 다들 웃는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아무 감흥이 없음을 다 같이 확인했다. 무난한 것은 무능력한 것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전개할까. 그것이 다음 주 수업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