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 곽재구

[올드걸의시집]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11월 하순 즈음, 피아노 선생님에게 아들의 겨울방학에 어떤 곡을 칠까 의논을 드리니 어쩌면 레슨이 어렵겠다고 한다. 가슴에 뭐가 만져져서 병원을 갔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단다. 선생님은 대학생 아들을 두었는데 단아한 스타일 덕에 거의 내 또래로 보인다. 너무 놀랐지만 설마 암은 아니겠지 걱정일랑 묻어두었다. 일주일 후,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 “네. 내일 모레 수술 날짜가 잡혔어요.” “그럼......?” “뭐...암이죠.” 평소처럼 차분하고 덤덤한 말투다.  

피아노 선생님은 과식이라던가 과음이라던가 과로라든가 하는 ‘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참하고 선했다. 아들이 초1때부터 중3까지, 딸도 8살부터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니까 지난 10여 년간 매주 2회~3회씩 우리 집을 드나드셨다. 마루에서 배밀이하던 꽃수레가 초등학생이 되고 덕윤이 키가 선생님을 추월했다. 선생님도 나도 눈가의 주름이 증가했다. 한결같고 별스럽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고 낭만적인 선생님 덕분에 아름다운 거리를 오래토록 유지할 수 있었다. 아들은 선생님의 성향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피아노를 여유롭게 즐겼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 몸의 불협화음이 난데없이 느껴졌다.  

“선생님 처음 뵌 게 10년 전이네요. 그 때랑 체형도 그대로이고 안색도 밝고 건강해 보이셨는데 믿기지 않아요.” “저도에요. 목동에서 가르치는 애들 중에 덕윤이가 제일 오래 됐고 서형이까지 같이 해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선생님은 우리 집 역사의 산 증인이다. 218동에서 206동, 그리고 129동으로, 목동의 집마다 거쳐 갔으며 영락한 살림에 망연자실한 나에게 늘 오던 시간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써 힘을 주었다. 아득한 순간들을 호명하노라니 가슴이 꽉 메어왔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처럼 10년 치 상념이 밀려와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선생님이 다시 레슨 할 때까지 아이들과 기다릴게요.’ 문자를 넣었다. 

나도 한 때는 겨울아이였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 소리 듣고 컸다. 생일에 첫눈에 성탄절에 설날에, 다 몰려 있는 은혜로운 계절로 알고 겨울을 살았다. 그런데 생의 어느 지점부터, 아마도 ‘겨울아이’의 옷이 작아진 즈음이겠지, 겨울이면 캐럴보다 부음이 먼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르신들이 서둘러 생을 등졌다. 올 겨울은 부모님 세대 분들이 아니라 나랑 아는 이들의 병고가 들려온다. 어제는 지인의 남편이 간암 선고를 받고 한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써클 동기가 1년 투병 끝에 난소암으로 숨졌다. 싸륵싸륵 눈꽃 쌓이는 축제의 계절에서 막차의 시간으로.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시간처럼 비틀비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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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비상구, 인천국제공항 4천미터 활주로

[사람사는세상]

손수레 한가득 짐 꾸러미를 이고 지고 밀고 끌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화사한 신혼여행 커플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효도관광 떠나는 어르신들도 있고 출장길에 오른 비즈니스맨,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유학생,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듯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긴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섞여있을 것이다. 목적은 달라도 표정은 닮았다. 설렘이 가득 괸 눈망울과 시간을 재촉하는 걸음걸이, 아마도 심장은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으리라. 삶의 진풍경을 연출하는 이곳은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출국층이다.

“근무한 지 10년째이지만 지금도 여기만 오면 덩달아 떠나고 싶다”는 김기민 인천국제공항공사 홍보팀 과장. 그의 바람이 말해주듯이 2001년 3월 29일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지난 십년간 수많은 이들에게 빠르고 안전한 ‘꿈의 비상구’가 되어주었으며 동북아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운행규모부터 어마어마하다. 인천국제공항에서는 매일 630여대의 비행기가 우리 전통문양 부챗살처럼 지구촌 곳곳을 향해 쭉쭉 뻗어나간다. 계류장 관제팀 김여진 대리(33세)는 이들 항공기의 원활한 이동을 책임진다. 계류장은 자동차를 세워두는 주차장처럼 비행기가 대기하는 곳이다.

“항공기가 시동 걸고 이동하고 정지할 때에는 반드시 관제사의 지시를 받아야합니다. 세계 각국의 항공기가 질서정연하고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관제탑에서 교신하면서 신호를 보내는 거죠.”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80미터 높이 관제탑에서 헤드셋을 낀 미모의 항공교통관제가 유창한 국제관제용어로 지시를 내린다니,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계류장에는 또한 항공기 외에도 급유, 청소, 짐 하역 등을 맡은 조업사 차량도 수시로 오간다. 비행기와 차량들의 흐름이 뒤엉키지 않도록 이착륙과 주행을 유도하는 것이다.

“날씨가 안 좋을 때가 가장 힘들죠. 안개도 문제지만 눈이 내릴 때는 활주로 평면이 미끄럽고 기체에 쌓인 눈을 치워야하니까 기본적으로 한 시간, 길게는 두 세 시간씩 지연되거든요. 항공기 한 대당 이삼백 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어서 안전에 대한 책임감이 큽니다.”

지난겨울 60년 만에 폭설이 내렸을 때, 일각에서는 공항폐쇄와 결항을 예상했으나 인천국제공항은 첨단 장비와 전문 인력이 합심하여 무사히 운행을 마쳤다. 이처럼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최고의 전문가’라는 자부심이 남다르다고  김여진 관제사는 말했다. 그럴만 하다. 인천국제공항은 국제공항협의회가 실시하는 공항서비스 평가에서 5년 연속 세계 1위 최우수 공항에 선정되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관문을 365일 안전하게 지키고 진심어린 서비스를 베푼 덕분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안전. 하늘에 계류장관제팀이 있다면 땅에는 운행안전팀이 있다.


“안전이란 개념이 포괄적입니다. 항공기에는 여객이 타고 있으므로 주위는 다 멈춰야겠죠. 지나가는 새조차도 잠시 멀리 쫓아야하고요.(웃음) 활주로에 작은 이물질이 있어도 안 되고 비가 와서 웅덩이가 파이면 메워야하죠. 안전운행을 위해 총괄적인 계획을 짜고 관련 부서에 업무 협조를 요청하는 등 안전코디네이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은 키다리 순경아저씨를 닮은 황명석(39) 안전운행팀 과장. 그는 실제로도 경찰이나 다름없다. 계류장에서 운행하는 각종 차량의 속도측정과 계류장전용 면허증 검사, 운전자의 음주측정을 도맡는다. 매일 네 차례 네 군데의 활주로를 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활주로 길이가 4000m에요. 광활한 지평선을 뚫고 해가 뜰 때, 그리고 캄캄한 밤이나 새벽에 사방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릴 때 세상도 조용하고 저도 조용하고 참 좋죠. 또 매일 활주로를 달리다보니까 인생을 멀리 내다보게 된달까요. 생각이 여유로워져요.” 가슴이 뻥 뚫리는 활주로 주행의 특권을 부여받은 그는 안전으로 보답한다. 작은 부속이나 자갈 하나라도 엔진에 들어가서 과열될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볼트나 너트를 발견했을 때 “오늘도 삼백 명을 구했다”고 안도한다며 활짝 웃는다.

티끌하나 없는 활주로 덕분에 우리는 지역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미래로 비상한다. 고맙고 놀라운 일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걸어서 시간당 4㎞, 말을 달려서 20㎞쯤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자동차로 1백㎞, 비행기로 8백㎞ 쯤은 거뜬히 주파한다. 선조들이 괴나리봇짐 짊어지고 이웃 마을을 다녀오는 시간에 현대인은 낡은 외투 걸치고 국경 넘어 마실 다녀오는 일이 가능해졌다. 국경의 울타리가 사라지고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구촌시대’가 열렸다. 육체 위에 덧입혀진 이데올로기, 피부색, 질병, 국가의 편견을 넘어 사람 사이의 경계선도 허물어졌다. 그렇게 하늘을 난다는 것은 생각을 가로지르는 것과 같다.


세계로 향하는 관문, 인천국제공항에는 공사 직원 외에도 법무부, 세관, 항공사, 은행, 음식점 등 3만 5천여 명이 종사한다. 누군가에게는 스쳐가는 꿈의 문턱이 어떤 이에게는 반복되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일상과 여행, 설렘과 회한, 시작과 마침, 상승과 하강, 실험과 도전, 추억과 상상의 에너지가 약동하는 인천국제공항. 드넓은 품안으로 오늘도 인류의 꿈을 담은 희망의 파랑새가 날아들고 떠나간다.

 * 야곱의 우물 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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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라 버마행동 대표 - “정부 비판한다고 난민 불허”

[행복한인터뷰]

가난한 불빛 번지는 거리를 지나간다. 저만치서 불쑥 나타난 경찰이 불러 세운다. 신분증을 요구한다. 난민을 신청한 상태라고 말한다. 일단 차에 태운다. 전화로 확인이 끝나면 그제야 풀려난다. 무시로 겪는 일이다. 이 번거로움을 피하려면 이걸 들고 다녀야 한다. 인도적 체류를 허가한다는 법원 판결문. A4크기 한 장이다. 가방 없이 가볍게 외출할 때가 문제다. 맨 손에 문서만 팔랑팔랑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검문을 피해갈 재간도 없다. 운수 사나우면, 또 경찰차 신세다.  

시도 때도 없이 존재증명-노동에 시달리는 뚜라 씨. 여러모로 고달프고 씁쓸하다. 지난 10월 버마행동 회원 8명을 난민으로 인정해야한다는 서울고법의 판결이 나왔다. 그런데 정작 버마행동 대표인 뚜라 씨만 난민인정 대상에서 쏙 빠져버렸다. ‘버마행동’은 산업연수생 등으로 한국에 들어온 버마인들이 자국의 민주화를 위해 결성한 정치단체다. 그간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과 버마 민주화 운동 등 적극적 활동을 펼쳤고 그 시작과 선두에는 뚜라 씨가 있었다. 그들은 왜 난민을 원했고 그는 왜 배제되었나. 12월 5일 부천시 심곡본동 버마행동 사무실에서 뚜라 씨를 만났다.  

버마행동 대표로서 난민신청

“처음에는 난민을 신청할 생각이 없었어요. 2003년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어요. 버마 친구들과 농성에 참여했죠. 친구들 몇 명이 모여서 우리가 왜 이렇게 한국 땅에서 쫓겨난 모습인가, 버마문제 때문이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 자리에서 제안하고 동의해서 바로 ‘버마행동’을 만들었죠. 항의 농성하고 기자회견 하고. 전부 얼굴을 노출하고 활동했어요. 이대로 가다가 활동가들이 쫓겨나겠더라고요. 안정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2004년 5월 난민을 신청하게 됐습니다.”  

6년 전, 버마행동 대표 뚜라 씨는 인천출입국사무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난민신청서를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담당자가 밖에서 단속하고 있다고 했다. 기다렸다. 돌아온 담당자는 조롱하듯 말했다. ‘뻔히 안다. 한국에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다. 버미인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말씨름이 벌어졌다. ‘개인적인 이유라면 난민인정 만이 아니라 집이나 차를 줘도 한국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필요로 한국에 머물기 위해 난민 신청하는 것뿐이다’ 강하게 항변했다.  

“그 마음 아직도 변치 않았어요. 내 역할이 버마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커요. 지금 버마 젊은이들 의식화 사업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여기서 활동가를 교육시켜 버마로 보내고 버마 내 도서관 만들기 등 각종 민주화 투쟁을 지원해요. 한국과 국제사회에 버마의 상황을 알리는 일도 하고요. 그런데 내가 지금 버마에 가봤자 할 수 있는 역할이 작아요. 그게 아니면 여기에 왜 있겠어요.”  


“한국 반정부 활동가로 찍혔다”

뚜라 씨는 1994년 한국에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해서 경기도 일대 제조업체에서 프레스 기계가공분야에서 일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한 달에 18만원 받았고 야간수당은 한 100시간 넘게 해야 5만원 받았다. 산업연수생 처지를 악용해 업주가 노골적 착취를 일삼았다.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강요당한 뚜라 씨는 서서히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적 횡포에 눈떴고 저항했다. 2003년 버마행동을 발족시키고 2004년부터 이주노동자방송 공동대표로 나섰다. 어느 날 ‘이주노동자 활동가’된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활동가들 중에 민주화운동 하려고 한국에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에요. 저 역시 처음에는 버마인 인권탄압에 문제를 느끼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산업연수생 제도 철폐 시위, 여수 참사 집회, 단속 사망 사건 항의 등에 다 참여했죠. 이런 활동을 법무부 쪽에서는 한국에 대한 반정부 활동으로 판단해요. 싫어하죠. 버마민주화를 위한 활동이랑 상관이 없다는 거죠.  

그런데 아니에요. 한국에 버마인이 3~4천 명입니다. 더 많이 버마 민주화 운동에 관심 갖고 참여하면 좋잖아요. 그래서 노동 상담이나 인권 문제로 다가가서 돕고 관계 맺고 버마의 현실을 알리는 거예요. 한국 반정부 활동이 아니고 버마인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얘기하는 건데 정부에서 들어주지 않으니까 길거리로 나와서 전달하는 거죠. 그런데도 아직까지 저를 미워하고 있어요.” 

버마 난민 100 명, 기준은 글쎄

갑갑한 현실에 허탈한 웃음을 짓는 뚜라 씨.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버마인이 모두 100여 명이다. 소수민족 인종차별, 종교, 민족, 정치적 탄압 등을 이유로 신청한 경우 거의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버마에서 소수민족이라고 무조건 탄압 받는 것은 아니다. 버마민족인데도 마을전체가 포탄을 맞는 등 대학살이 이뤄진다. 하지만 심사 과정에서 그러한 현지상황을 세세히 알아보지 않는다.  

또한 한국에는 버마 민주화단체가 2곳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한국지부와 버마행동. NLD활동가 30여 명은 거의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버마 민주화에만 집중하고 한국에서 일하는 버마인 인권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버마행동은 “순수(!) 정치조직이 아닌 민중운동조직으로 한국정부에 찍혔다.” NLD한국지부 활동가와는 대조적으로 버마행동 활동가는 이제껏 난민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것.

“감정가는 대로에요. 한국에 있어도 문제없을 거 같으면 쉽게 넘어가는데 한국 사회를 잘 알면 문제 삼아요. 저한테도 경제적 목적으로 난민지위를 신청한다고 주장하면서 버마민주화 활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그런데 (버마행동을 위해) 10년 가까이 매월 회비 십만 원 씩 내면서 평일 밤과 토요일 일요일을 일했어요. 난민 신청 받으려고 10년 가까이 그런 고생을 누가 하겠어요.”  

앞서 말한 대로, 뚜라 씨는 버마로 돌아갔을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정치적 난민을 신청했으나 허가는 나지 않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된다며 인도적 체류 증서만 나온 상태다. 귀퉁이가 닳아 너덜너덜해진 증서를 투명 파일에 고이 끼워 보관해두었다. 간편하게 허가‘증’ 형태로 발급 받으려고 했으나 출입국사무소 담당자가 그동안 불법체류 기간을 계산해서 벌금 2000만원을 먼저 내라고 엄포를 놓았다. 설상가상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저 낡은 서류 한 장에 한국에서 살 권리를 의탁해야 하는 처지다.

박해와 죽음 각오됐다

뚜라 씨는 요즘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전기 컨트롤 박스 만드는 업체에 주2-3회 출근한다. 버마행동 자금마련 등 돈이 필요해서다. 고된 노동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좋아졌다.” 낮에는 생각의 전원을 내리고 전화기도 꺼놓고 오로지 몸만 쓰고 일만 한다. ‘의식의 백지상태’를 유지하다가 밤에 귀가해서야 활동가 모드로 변신한다.  

“활동가 일이 훨씬 힘들어요. 회사에서는 맡은 일만 하면 끝나고 몸 힘든 건 잠깐 쉬면 낫잖아요. 근데 활동가 일은 눈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심지어 꿈속까지 일이 끝이 없어요. 많이 지쳤고 계속 밝은 모습으로 지낼 수가 없었어요. 일 년 사이 일을 많이 줄였어요. 그랬더니 지금은 밝은 모습으로 지내요.”  

한국체류 17년.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숨을 고르는 중이다. 그 뿐 아니다.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열심히 한다. 남들은 근육몸매 만들려고 운동하는 줄 아는데 투쟁의 일환이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감옥에 갔을 때 한번만 맞아도 죽을 수도 있으므로 오래 살고 견디기 위한 노력이다. 만일의 사태, 즉 투옥에 대비하고 “박해와 죽음까지도 각오한다”

가슴 아픈 버마현실 선전투쟁

그럴 만큼 버마의 상태는 악화일로다. 88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아웅산 수치 여사의 NLD가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미얀마 군정은 정권 이양을 거부했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은 군부가 바꾼 국호 ‘미얀마’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외침을 군홧발로 짓밟은 군부는 2007년에는 거리에 나선 승려들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버마 민주화의 상징 수치 여사는 20년 중 14년을 가택연금 당했다가 최근 석방됐다. 미얀마 군부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또 국가통합이란 이름으로 엄청난 폭정을 휘두르고 있다. (2011. 12. 11. 한겨레 참조)  

이러한 참담한 버마의 실상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버마행동이 존재한다. 그런데 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와 연대가 전무한 상태다. 버마를 불교국가이거나 혹은 투자하기 유망한 나라로만 인식할 뿐이니 활동가들은 애가 탄다. 야속하다. 그럴수록 더 치열하게 활동할 밖에. 안으로는 버마 알리기에 주력하고 밖으로는 버마 민주화에 헌신한다. 활동가를 교육시켜 보내고 버마 마을에 도서관, 세미나, 주민 센터, 야학을 만드는 등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버마는 지식이나 정보가 차단돼 있어 저런 모임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버마 젊은 친구들 봤을 때는 가슴이 너무 아파요. 버마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다 가슴 아프죠. 왜 이런 지경일까. 정치만 잘 풀리면 되는데, 사람들 인격도 좋고 자원도 풍부하고 잘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하다보면 가끔 눈물 많이 흘려요. 버마행동 회원들도 젊은 나이에 한국 와서 고생하고, 시간 흘러가는 거 보고......” 


회한에 젖어든 뚜라 씨.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이 국민이 아니라 국민인 한에서 인권이 부여되는 국민국가에서 그는,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철저히 비인간으로 존재했다. 대한민국의 과부족 노동력을 제공하면서도 맘 편히 잠들고 보행할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 국적과 인권의 두 다리를 잘린 채 살아갔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말대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당할 때 사람은 올바로 사고 할 수 있는 법.  

뚜라 씨는 위험을 알면서도 거리로 뛰쳐나가는 모험을 단행했고, 노예적 억압과 인간적 존엄 사이에서 부드러운 결단을 내렸으며, 어려운 시절 동료들과 머리 맞대고 수저질하던 배고픈 기억을 아름답게 간직했다. 17년 험한 세월 모진 고통이 그를 평범한 노동자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길러냈다. 이제는 어디에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가를 가늠해 삶의 근거지를 정하고 ‘제 갈 길을 가려한다. 남이야 뭐라던!.’ (맑스)  

난민 상관없이 내 길 간다

“난민은 신청을 해놓았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어요. 진짜 인정받고 싶었다면 여러 가지 준비하고 자꾸 물어보고 그랬을 텐데 다른 일이 많아서 신경 쓸 틈이 없었죠. 음. 난민이 된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한국 정부가 뭐라던 제 신념과 제 일을 해나갈 거예요. 저는 한국 사회에 해 끼친 것 없어요. 버마에 돌아갈 때도 좋은 모습으로 돌아갈 거예요. 울고불고 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정의, 정당한 결정과 평등한 이유로 쫓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결정을 내리면 버마 민주 활동을 위한 제 역사를 보여줄 거예요. 저의 버마민주화 운동이 난민인정 받기 위해서라는 건 모욕하는 말입니다. 이주노동자 인권활동 때문에 난민을 받아줄 수 없다면 수용하겠지만 버마 민주화 활동을 모욕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토요일 밤이 깊어갔다. 버마행동 사무실로 퇴근한 뚜라 씨는 인터뷰를 마치자 좁은 부엌에서 친구들과 늦은 저녁을 해 먹는다. 곧 개미가 기어 다니는 누런 장판에 둘러 앉아 회의와 토론으로 밤을 보낼 것이다. 십여 년 째 반복되는 주말 풍경이다. 이 단내 나는 세월을 오로지 난민인정용 ‘연극’으로 해석하는 부당한 판결이 내려진다면 어찌 온 생애를 걸고 저항하지 않겠는가. 유순한 난민이 되느니 견결한 투사로 살리라. 그의 삶은 명령한다. 


* 위클리수유너머 45호 전선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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