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이 끝나갈 무렵

[차오르는말들]

어느 토요일 오후. 밖에 있는데 꽃수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집에 오니까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서 수레가 껐어. 뚜껑을 열려고 행주를 댔더니 치익~ 소리가 나서 무서워서 안 열었어.” 그 얘길 듣고서야 불현 듯 가스불을 켜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올려놓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국도 아니고 찌개도 끓이지 않았다. 도대체 가열해서 요리할 것이 없는데 뭘까?  

집에 가서 냄비를 보고서야 알았다. 오랜만에 보리차를 끓인다고 물을 한 냄비 가득 올려놓았음을. 냄비가 외롭게 몸을 데우다가 태우고 있었을 시간을 헤아려보니 무려 1시간 반이다. 냄비가 잿빛으로 변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불이 났을까. 그 생각을 하자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나의 허술함을 개탄하는 한숨이다.  

이틀 동안 핸드폰 분실소동을 일으켰다. 외출할 때 입은 외투 주머니를 뒤져도 없어서 동선을 거슬러서 찾아보고 집안을 뒤지고 서점가서 물어보고 그래도 찾지 못해 일단 발신정지를 시켰다. 조용한 게 좋아서 진동상태로 해놓은 핸드폰. 어디 길바닥 구석에서 쓰러져 몸을 떨고 있으려나.  

핸드폰이 귀찮을 때도 많았는데 없으니까 무척 아쉬웠다. 답답하고 불편했다. 가장 아쉬운 건 전화번호. 인생의 지도를 분실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외투에서 찾았다. 나는 철석같이 감색 점퍼를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카키색 외투 주머니에 떡하니 들어있었다. 반갑고도 허망했다. 이번에는 한숨도 안 나왔다. 이쯤되면 위험한 망각증이다.  

요새 일상이 엉망이다. 뿌리가 잘린 식물처럼 부유하고 있다. 책에 집중이 안 되는 게 제일 괴롭고, 글쓰기가 귀찮아져서 당황스럽다. 마음이 푸석푸석하니 시집도 시큰둥하다. 꽃단장도 흥미를 잃었다. 가사노동 하기가 싫어서 냉장고에 계란이 다 떨어져버리고, 세미나도 두 번이나 땡땡이쳤다.  

사람들 만나서 수다 떠는 것도 싫고 수유너머 가는 길이 대전처럼 멀게 느껴져서 꾀가 난다. 아버님 보청기 사드리고 아들 녀석 여드름 치료하고 고등학교 대비 수학학원에 등록하고 자동차세까지 내고났더니 주머니가 텅 비었다. 일 하기 싫다고 빈둥거리면서 돈이 없으니까 신경질난다. 총체적 난국이다.

겨울잠 자려고 동굴에 누워서 잠들지도 못하고 뒤척이는 곰같다. 일상이 둔하고 삶이 무겁다. 기억은 죄다 흘리고 생의 의지는 바닥났다. 예전엔 힘들게 투쟁하는 사람들 만나면 힘이 났는데 이제는 힘이 들었다. 눈물 나고 슬퍼서 허우적거렸다. 글을 쓰고 있으면 몸이 나락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인간이라는 종한테 희망이 있는가, 긍정의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투쟁하다가 냉소하는 게 가장 손쉬운 선택이거늘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  

내가 좋은 엄마인줄 알았는데 방목과 탈경쟁을 이유로 아들에게 무심했다는 자각에 며칠 간 가슴이 아렸다. 피와 살이 되는 얘기 들려준다면서 일방적으로 내 가치만 주입한 것 같다. 아들의 대사 속에서 지 나름대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이 언뜻언뜻 읽혔다. 서로 화음을 맞춰가야 하는데 삐그덕 소리만 요란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과 맞장 뜨던 호기는 어디가고 세상의 무거움에 납작하게 깔릴 만큼 나의 신체는 무기력하다.

방황하는 동안 수많은 상념이 교차했다. 평균수명대로 산다면 나는 향후 40년을 무엇을 하고 살아야할까. 어떻게 삶의 가치를 발명해야 하는가.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자식과의 상호 삶을 해치지 않는 아름다운 거리는 어디까지인가. 무엇은 해주고 무엇은 놔두어야 하는가. 한없이 번져나가는 삶의 물음들에 아득해졌다.  

지금은 괴로운 방황담을 되새김질하고 기록할 만큼 기운이 회복됐다. 몇가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됐다. 핸드폰 찾기는 제법 드라마틱했다. 시댁 어른 생신이 있어서 저녁모임에 갔다가 돌아와 옷을 걸려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 순간에 남편은 혹시나 내 핸드폰 주운 사람이 전화를 받을지도 모른다면서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베란다 문을 닫으려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음이 들려왔다. 귀를 의심했다. 남편이 재차 전화를 걸고 조용한 상태에서 추적해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옷 주머니에 핸드폰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의 단기 기억상실증에는 좌절했지만 그 놀이가 재밌었다. 어둠속에 풀벌레 소리처럼 들려오는 진동음. 아련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얼음장 같던 마음에 살짝 볕이 든다. 타락한 존재가 우글거리는 세상. 그곳에서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복된 삶을 위한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물으니 그것은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일상을 살아내고 한 사람을 인류로 대하는 곳에서만 시작된다는, 교과서 같은 답이 들린다.

꽃수레랑 버스에 둘이 앉아 있는데 꽃수레가 손에 뭐가 났다며 보여준다. 작게 곪은 상처다. 내일 피부과에 가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꽃수레가 연극적인 대사를 친다. "엄마가 수레를 참 아끼는가 보다! 이런 작은 일로 피부과까지 가자고 하고~" 억양이 하도 깜찍해서 푸핫 웃음이 나다가 뭉클했다. 꽃수레의 손을 잡고 있자니 '아낀다'는 말의 온기가 전신으로 퍼졌다. 누구를 아끼는 마음이란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가. 다시 약한 존재를 아낄 수 있는 자로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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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 뮤지컬 배우 - 나의 인생은 한국뮤지컬 역사

[행복한인터뷰]

무대 위에서는 감전될 듯 뜨겁지만 겨울날 시린 햇살 아래서는 한들한들 다사롭다. 긴 치마와 굵은 물결머리에 안개꽃을 품은 자태가 그림엽서 소녀마냥 수줍기도 하다. 하나의 의미로 갇히길 거부하는 천생 배우 최정원. 삶의 어느 자리든 맡은 배역마다 싱크로율 100%다. 그래서 그녀 곁엔 항상 아우라와 박수가 따른다. 상복은 덤이다. 얼마 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활짝 웃는 두 뺨에 아직도 살짝 감흥이 배어난다.  

눈물
“1995년 한국뮤지컬대상 제1회에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로 여우신인상을 받았어요. 다음해에 여우조연상을 받고 제7회 때 <시카고>로 여우주연상 받았죠.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고 그랬죠. 이후에도 계속 후보에는 올랐지만 한번 상을 받았으니까 후배들에게 기회도 줘야하고 기대를 안 했거든요. 마음을 비우고 있다가 받아서 더욱 기뻤던 거 같아요.”

지난 10월 제16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키스미케이트>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최정원은 눈물을 쏟으며 무대에 올랐다. 감회가 남다른 것이, 그녀의 생애는 한국뮤지컬 역사와 그대로 겹친다. 신인상으로 시작해서 연기 인생 20년 즈음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뮤지컬배우로서 삶의 시계바늘이 비약할 때마다 수상의 영예를 누린 셈이다. 또 한 가지. 최정원은 청룡영화제 심사위원이다. 매회 스물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타인의 연기를 평가한다. 저마다 영화배우들 혼신의 노력을 접하면서 연기에 대한 시각이 한층 폭넓어진 상태였는데 상을 주는 입장에서 받는 입장에 놓이자 감격이 배가됐다고 터놓는다.  

박수
잘 웃고 잘 울고. 잘 느끼고 잘 물드는 배우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재롱 수준을 넘어 공연을 선보였다. 다섯 명이상 모이지 않으면 노래를 하지 않았을 정도다. 모창을 잘했다. 윤시내 노래를 부르면 박수가 터졌다. 일찍이 박수의 맛을 알아버린 아이는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우며 소녀로 자랐다. TV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뮤지컬 영화를 보고 사랑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판타지의 세계에 매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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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 곽재구

[올드걸의시집]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11월 하순 즈음, 피아노 선생님에게 아들의 겨울방학에 어떤 곡을 칠까 의논을 드리니 어쩌면 레슨이 어렵겠다고 한다. 가슴에 뭐가 만져져서 병원을 갔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단다. 선생님은 대학생 아들을 두었는데 단아한 스타일 덕에 거의 내 또래로 보인다. 너무 놀랐지만 설마 암은 아니겠지 걱정일랑 묻어두었다. 일주일 후,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 “네. 내일 모레 수술 날짜가 잡혔어요.” “그럼......?” “뭐...암이죠.” 평소처럼 차분하고 덤덤한 말투다.  

피아노 선생님은 과식이라던가 과음이라던가 과로라든가 하는 ‘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참하고 선했다. 아들이 초1때부터 중3까지, 딸도 8살부터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니까 지난 10여 년간 매주 2회~3회씩 우리 집을 드나드셨다. 마루에서 배밀이하던 꽃수레가 초등학생이 되고 덕윤이 키가 선생님을 추월했다. 선생님도 나도 눈가의 주름이 증가했다. 한결같고 별스럽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고 낭만적인 선생님 덕분에 아름다운 거리를 오래토록 유지할 수 있었다. 아들은 선생님의 성향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피아노를 여유롭게 즐겼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 몸의 불협화음이 난데없이 느껴졌다.  

“선생님 처음 뵌 게 10년 전이네요. 그 때랑 체형도 그대로이고 안색도 밝고 건강해 보이셨는데 믿기지 않아요.” “저도에요. 목동에서 가르치는 애들 중에 덕윤이가 제일 오래 됐고 서형이까지 같이 해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선생님은 우리 집 역사의 산 증인이다. 218동에서 206동, 그리고 129동으로, 목동의 집마다 거쳐 갔으며 영락한 살림에 망연자실한 나에게 늘 오던 시간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써 힘을 주었다. 아득한 순간들을 호명하노라니 가슴이 꽉 메어왔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처럼 10년 치 상념이 밀려와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선생님이 다시 레슨 할 때까지 아이들과 기다릴게요.’ 문자를 넣었다. 

나도 한 때는 겨울아이였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 소리 듣고 컸다. 생일에 첫눈에 성탄절에 설날에, 다 몰려 있는 은혜로운 계절로 알고 겨울을 살았다. 그런데 생의 어느 지점부터, 아마도 ‘겨울아이’의 옷이 작아진 즈음이겠지, 겨울이면 캐럴보다 부음이 먼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르신들이 서둘러 생을 등졌다. 올 겨울은 부모님 세대 분들이 아니라 나랑 아는 이들의 병고가 들려온다. 어제는 지인의 남편이 간암 선고를 받고 한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써클 동기가 1년 투병 끝에 난소암으로 숨졌다. 싸륵싸륵 눈꽃 쌓이는 축제의 계절에서 막차의 시간으로.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시간처럼 비틀비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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