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소송> 읽혀지지 않는, 읽고싶어지는

[비포선셋책방]


“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읽고 싶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와. 진짜 재밌더라.” 세미나 시간. 쥐-그래피티 이후 예술가를 참칭하고 다니는 박모강사가 들떠 말한다. 예술적 감성이 폭주하는지 요즘 들어 음악에도 부쩍 관심을 보이는 그. 예술가연 한다고 나한테 놀림을 당하는데, 카프카 소설마저도 솜사탕처럼 스르르 소화시킨 모양이다.

나는 푸념했다. 소설은 역시 나랑 안 맞는다고. 읽고 있으면 따분하다고. 특히 카프카는 난해하다. 내러티브가 익숙하지 않다. 골짜기를 탐험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구조. 정상은 끝까지 나오지 않고 어둠도 걷히지 않다가 종말에 와서는 무죄를 밝혀내지도 못하고 맥없이 죽는 주인공이라니. 한 없이 건조하다. 물론 해설서를 보면 ‘작품의 의의’를 이해는 하지만 읽으면서 책에 머리 박고 흠뻑 빠져들 수는 없었고 책장을 덮고는 뭘 읽었는지도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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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나 리시차와 함께 한 일요일 오후

[차오르는말들]




Valentina Lisitsa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월광 3악장

'소낙비를 맞고 나면 우산이 필요없지'  여고생 때 팬시노트를 모았다. 내 책상서랍은 메모지와 편지지까지 가을날 낙엽이 쌓인 곳간이었다. 만년필로다가 시집이나 책에서 본 아름다운 글귀를 옮겨적었는데 거기에 써 놓았던 문구다. 어린 나이에 왜 저 말이 좋았을까. 겉으론 얌전한 아이였지만 안으론 폭풍같은 삶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우산도 없이 소낙비를 맞으며 거리를 떠도는 장면은 노래방 뮤직비디오 배경화면으로도 쓰지 못할 삼류영상이겠지만, 가끔 꿈꾼다. 소낙비에 흠씬 젖은 나. 그러고 나면 마음에 풀썩이는 먼지가 싹 가라앉고 비갠 뒤 아침처럼 미풍 살랑이는 평화로운 날들이 펼쳐질 것같다. 그런데 원할 때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또 남의 시선이 중요하니까 현대인은 소낙비를 맞지 못해서 샤워기 아래에서 머리를 적신다. 몸이 젖으면 맘이 씻긴다는 게 신기하다. 육체와 정신은 상호 교통한다.

비는 하늘에서만 내리지 않는다. 피아노에서도 내린다. 그것을 입증해준 발렌티나 리시차의 폭풍연주.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77년 생. 강력한 힘과 엄청난 속도로 곡을 장악하는 그녀는 '피아노 검투사'란 재미난 별명을 지녔다. 연습량은 실력을 배반하지 않는 모양이다. 피아노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베토벤의 열정과 고뇌를 그대로 흡수한 <월광> 3악장도 전율이 일지만 쇼팽의 <추격> 연주는 압권이다. 울 아들 왈, 엄마한테 잔소리 듣고나서 들으면 딱이라나 뭐라나. 특별히 야단치는 사람도 없는 난 지 혼자 야단치고 지 혼자 위로한다. 요즘따라 발렌티나 리시차가 꿀맛이다. 금기를 깨고 싶은 자들, 생의 이행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맞춤한 음악. 마치 니체를 읽는 기분과도 유사하다. 거침없고 격정적이다. 마음의 빗금을 넘어 일탈을 권한다.

새해 첫 일요일 오후, 나른한 가운데 책과 음악을 번갈아 뒤적이며 노닐고 있다. 딸내미는 목욕탕 가자고 하는데 소낙비 안을 선뜻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때 마침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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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빈 손 / 성기완

[올드걸의시집]




당신을 원하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떠돌이

가 돼 그것을 놓았는데 다른 무얼 원할까 그 무엇도

가지기가 싫은 나는 빈 손, 잊자 잊자 혀를 깨물며 눈

을 감고 돌아눕기를 밥먹듯, 벌집처럼 조밀하던 기억

의 격자는 끝내 허물어져 뜬구름, 이것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잊혀지고 말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은 해구

보다 더 깊어져 나는 내 빈 손을 바라보다 지문처럼

휘도는 소용돌이 따라 망각의 물로 더 깊이 잠수하

며 중얼거려 잊자 잊자

 

- 성기완 시집 <유리이야기> 문학과지성사

 



“요즘 뭐 하고 지내셨어요?” “방황하면서 지냈어요.” 말해놓고 나니 푸푹 한숨 같은 웃음이 터졌다. 2010년 마지막 날, 수녀님과 이별을 고하기 위해 마주했다. 지난 일 년 수녀님들이 만드는 책의 표지이야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맡았었다.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한 일이었고 2011년도 길 여행 계획까지 세워두었던 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길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원고를 보내면서 수녀님께 이실직고를 올렸다. 그만두고 싶다고. 모든 헤어짐은 서먹하다. 변명을 보탰다. “사실 원고 15매 쓰기는 저한텐 일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서요.” 말끝을 흐리자 수녀님은 동화책에 나오는 마더테레사 같은 너그러운 미소로 손을 줘보라 하셨다. 내 손 위에 손을 포개고는 그동안 애썼다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것도 많다고 잘 쉬라며 꽉 쥐어주셨다. 연주를 마친 악기처럼 은은히 온기가 번지는 빈손을 주머니에 끼워넣었고 돌아섰다. 헤어질 때 울지 않게 된 것을 스스로 대견히 여기며 중얼중얼, 영하의 바람을 가르는 혼잣말 떠돌이가 되어 한참을 걸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따뜻한 밥 한 끼 먹자던 선배에게 갔다. 빨간 냄비에선 청국장이, 일인용 갈색 뚝배기에선 계란찜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누가 차려주는 밥을 열심히 먹었다. 왜 뜨거운 국물은 목에 들어가면 말간 콧물 되어 나오는 걸까. “나 포함해서 사람들이 불쌍해. 인간이란 종에게 희망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힘들 게 싸우는 사람들 만나고 오면 힘이 났는데 우울해. 무기력해지고.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슴에 고인 검은 회한을 퍼내며 하얀 밥덩이를 우겨넣었다. 한참 후 빈 밥그릇에 냉수같이 싱거운 말이 들어찬다. “그럴 때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또 나아진다. 좀 쉬어라.”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와서 찬물로 했더니 고무장갑을 벗어도 손이 빨갰다. 동태처럼 뻣뻣한 손, 절절 끓는 아랫목에 녹였더니 흐물흐물 익어서 도로 빨개졌다. 오래 울어 퉁퉁 부은 눈처럼 부푼 발개진 나의 빈손, 헤어진 손. 삶을 원하지 않기로 한다. 잊자 잊자. 2011년은 계획없음. 목적없음. 화폐없음. 사랑없음. 외롭기로 작정한 빈손으로 2010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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