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 황인숙

[올드걸의시집]

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그 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희고 곧고 깨끗한
아, 청량한 너의 청년! 

그 모습은 내 동공 안쪽
뇌리에 각인돼 있고
내 아직 붉은 심장에
부조돼 있다.


-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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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 카프카와 작품의 요구

[비포선셋책방]

모리스 블랑쇼가 누구냐. '쓴다는 것은 매혹이 위협하는 고독의 긍정으로 들어서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사람이다. 더없이 클래식한 표현. 왠지 프랑스에서 태어나 걸음마 떼면서부터 철학을 시작하여 문청을 거쳐 사상가로 깊은 주름을 만들어낸 프렌치코트 깃 세운 노신사가 떠오른다. 맞다. 1907년에 태어나서 2003년에 돌아가셨으니 참 오래 사셨다. 철학과 문학비평 등등 작품이 많다. <문학의 공간>이 주저서로 알려졌다. 그 책을 넘기면 '철학책'스러운 관념어들이 나열돼 있다. 본질적 고독, 문학의 공간, 작품과 떠도는 말, 릴케와 죽음의 요구, 영감, 문학과 근원적 경험 등등. 예상대로 읽기가 수월치 않다. 강밀도가 높다. 그러니 고급수제초콜릿처럼 한번에 읽어치우지 말고 혀에 품고 녹여야한다. 글을 눈에 바르고 있으면 풍미가 느껴진다. 시 같은 책이다. 단숨에 안 읽히는 도도함에 은근히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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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사람사는세상]


짙은 보라색 어둠이 칠해진 거리. 군데군데 간판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황량한 대로변엔 삶의 배설물이 낭자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캔이 구르고 비닐이 저 홀로 춤춘다. 옷깃을 세운 남자가 단역배우처럼 구부정한 뒷등을 보이고 사라진다. 정지화면 같은 적막함 뚫고 어디선가 쓰륵쓰륵 싸리비질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산사의 정적을 깨우는 목탁소리 같기도 하고 아침밥을 짓는 어머니의 쌀 씻는 소리 같기도 하다. 반복적인 만물의 기척에 산새가 파닥거리고 아이들이 눈 뜨듯이, 연두색 빗자루가 지나간 이곳 거리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 5시 반, 해님보다 먼저 찾아온 환경미화원으로부터 명동의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 4시 넘어 일어나서 첫차 타고 나와요. 겨울이 추우니까 제일 힘들죠. 더운 게 낫긴 한데 여름엔 또 아이스크림, 음료수 쓰레기가 많아요. 명동은 원래 유명해요. 정말이지 너무 지저분해서... 유동인구가 많아서 그렇지 뭐. 짐승이 지나간 자리는 표시가 안 나도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표시가 난다고 하잖아요. 다 먹고 입고 버린 것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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