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차오르는말들]

지금 파리는 새벽 한 시 반이고 남자친구도 강아지들도 다 잠이 들었어요. 공부하던 책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았다가, 잠 안 오면 한잔씩 마시려고 사다둔 술을 병 채로 마시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벽이고 술을 마셨으니까 감정적이어도 이해해달라고 자기변명을 하는 중이에요. 아니 이렇게 해야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어리광을 부려보는 중이에요....떠나...온...거 후회해요. 이제는 밤에 잠도 잘 이루지 못할 만큼. 왜 그때 떠나왔을까. 뭘 배우겠다고 떠나왔을까. 나 살던 공동체에서도 못 찾던 답이 여기에 있을 리 만무한데. 전 이제 비판 따위 할 자격도 없는 놈인 거 같아요.

언니는 자본주의가 뭐라고 생각해요? 소작농들의 처절한 일 년 농사를 다 앗아가는 지주나 노동자들의 노동의 대가를 다 가져가는 부르주아나 다를 것도 없는 더러운 세상에 그래도 신분제가 철폐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진보였다고...언니 한 마디만 대답해주세요. 그럼 정말 믿을게요.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 어떤 혁명가의 말보다두요... 어제 홍대 미화원 노조에 쌀을 인터넷으로 사서 보내놓고 전 제 자신이 용서가 안돼요. 나이라는 걸 먹으면 강해질 줄 알았고 강해지면 더 또렷해질 줄 알았는데 스무 살이건 서른 살이건 한국 이건 프랑스이건 저는 아직도 질문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이젠 제 자신에 대한 분노로 비판도 부끄러워 너무 부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도 없어요.

생태공동체건 유럽식 사회주의 복지사회건 모두 허울임을...설령 프랑스의 노동자가 잘 살고 한국의 노동자가 잘 살게 된 들 남미의 농민이 가난한 세상이면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왜냐하면 북반구의 산업 국가의 노동자들이 한때나마 임금이 올라 잘 살아도 그 구조적인 자본주의의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국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거... 내 공동체만 억울한 이 없으면 끝날 일도 아니기에. 눈만 뜨면 정보라는 이 세상에 1초면 이렇게 구만리를 넘어 글이 도착하는 이 세상에 연대조차 못하는 우리가 태연하게 사회의 잉여물로 공부라는 걸 했다는 저 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에...언니, 미안해요. 질문이라는 거 계속하면 그거 답은 아니더라도 길은 보이겠죠? 그죠?

 


네 편지 읽으니 좋구나. 젊음이 느껴진다. 그런 고뇌, 그런 방황 나는 안 해본지 너무 오래된 거 같아. 보수적이 되어가는 증거겠지. 자명한 것에 물음을 던지지 않는 것 말이야. 떠나온 것 후회되니? 난 태어난 것이 후회된다. -.- 이 세계가 추악하고 나란 존재는 무기력하고 그래. 요새 인생 최대의 슬럼프를 보내고 있단다. 서울은 한 달 넘게 영하 10도 날씨가 계속돼서 마흔을 넘긴 내 몸은 완전 땅으로 꺼지려해. 그런데도 어젠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강의듣고 왔어. 살을 에는 찬바람 맞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남들처럼 무슨 학위 따고 연구자의 길을 갈 것도 아닌데...그냥 나의 갑갑함이겠지. 뭐라도 삶의 근거, 희망 나부랭이를 찾고 싶은.

산다는 것은 물음을 발명하는 일이지. 묻고 답하고 한 평생 그러다가 가는 거야. 물음이 멈출 때 투쟁도 끝나겠지. 네 공부도 이제 일 년 남았으니 좀 더 힘을 내렴. 일단 이루려던 목표는 이루고. 그곳이 서울이든 아프리카든 파리든 네 몫이 있을 거야. 혹시 공유정옥씨 아니? 운동권 의대생출신인데. 지금은 의사 그만두고 삼성백혈병 노동자 도우면서 노동보건운동 활동가로 일하더라고. 네 생각했어. 너도 의대 졸업해서 반도체산업 노동자들 위해서 일하면 좋겠다 싶더라고. 국제연대가 필요한 영역이기도 해서.

파리에 있으면서 홍대노동자 아주머니들에게 쌀을 보냈다니 나보다 훨씬 낫구나. 난 집에서 가까운데 아직 못 가봤거든. 그런 나누는 마음에 의학적 지식까지 갖추고 있으면 네 앎과 삶은 넘쳐흘러 누군가의 삶에 가 닿겠지. 우린 다 연결돼 있으니까 말야. 나는 궁극적으로 현장인문학이 하고 싶은데 이 세계를 덮고 있는 자본의 신을 벗어나 다른 삶의 척도를 발명할 수 있는 그런 삶의 공부를 하고 싶어. 근데 몸이 힘들고 아이도 둘이나 있고 머리는 안 돌아가서 괴로워. 그젠 남편이랑 싸웠어. 너도 알다시피 형부가 완전 순둥이인데 자기도 내가 외부활동이 많으니까 불편하고 싫은 가보더라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일도 힘겹고 공부도 그렇고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만 그래도 피하는 건 비겁하겠다, 여길 극복하지 못하면 또 걸리겠다, 그런 생각해.

네 고민들 네가 회의하는 것들, 가치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해. 현대정치철학 지형에서도 물음으로 채택한 것들이고. 그걸 잘 품고 농익혀서 살다보면 어떤 우발적인 기회로 사건은 다가올 테고 네가 무언가 하고 있게 될 거야. 떠나온 거 후회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유학생활에 그런 위기와 갈등이 없을 순 없겠지. 결혼생활도 마찬가지고. 나도 남편과 싸우고 펑펑 울었어. 삶은 늘 그래. 외부가 없더라. 대단한 무엇 없이 소소한 일상으로 굴러가고. 그게 삶의 놀라움이겠지. 너무 큰 물음 세워놓고 내가 작다며 자학하지 말고, 싸우는 노동자들한테 쌀도 보내고 나한테 하소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우리 그렇게 살자. 힘내렴. 술 먹고 인류문제로 꼬장 부리는 후배도 있고,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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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노동자 자살 "12시간 근무 기본…나 죽었다"

[사람사는세상]
'삼성LCD 고 김주현님(남,26) 빈소 순천향천안병원에 와 있습니다. 사측관리자들 말고는 너무도 적막하네요. 조문, 내일 11시 기자회견, 반올림카페에 격려글 올리기 등 마음과 힘을 모아주세요.'
 
어제 오후에 공유정옥 활동가에게 문자가 왔다. 삼성전자 직원이 또 죽었다니 무슨 일인가 기사를 찾아봤다. 하루 12시간-15시간 노동강도를 견디지 못한 26세 남성의 자살이다. 전혀 몰랐다. 포털화면에는 삼성가재벌녀 이부진 이서진의 패션감각  분석 기사가 떠있었다. 그동안 삼성에서만 100여 명의 노동자가 죽었고 죽어 가고 있으며 죽을 것이다. 전에 삼성일반노조 위원장님이 삼성전자에서 직원 뽑는 방법을 들려주셨다. 실업계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관광버스에 태우고 가서 강도 높은 체력테스트를 거친 이들만 합격시킨다고 했다. 그만큼 반도체 산업이 노동강도가 높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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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수레의 사랑으로

[차오르는말들]

그저께 남편이랑 싸웠다. 오랜만의 심각한 다툼이다. 무릇 부부싸움이 그렇듯이 사소한 안건이 싸우는 동안 인격 자체를 문제 삼는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남편의 감정 그래프는 원래가 잔잔한 해수면이고 나는 파도치는 유형이다. 그래서 싸움의 러닝타임은 길게 가지 않는다. 내가 폭풍 분노를 퍼부으며 눈물을 찍어내다 보면 남편은 쿨쿨 자고 있다. 허탈하다. 나 홀로 분노의 뒤안길 어슬렁거린다. 하나둘 케케묵은 원한감정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마치 버스가 흙탕물 튀기고 지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기억의 오물을 뒤집어쓰고서 나는 맹렬히 후회한다. ‘그 때 결판을 내렸어야 하는데......’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서’ 마루에다 이불을 폈다. 평소에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야 잠이 잘 온다며 아빠 곁을 사수하던 꽃수레를 꼬드겨서 오늘은 엄마 옆에서 자자고 했다. 이불위에 나란히 누웠다. 불을 껐다.
“수레야. 넌 아빠가 왜 좋니?”
“성진이(아빠)는 내 친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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