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니까

[글쓰기의 최전선]

거리, 도서관, 모텔, 버스, 술집...기억에 남는 장소다. 남편과의 연애는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 주말마다 집회에 같이 나가고 술 마시는 자리나 공부할 때나 항상 옆에 있었다. 사노맹에서 하는 무슨 강좌에도 손잡고 다녔다. 종로 어디쯤 골목길 같은데 장소와 배운 내용이 하얗게 지워졌다. 낡은 책상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랑 옆자리 남편의 착한 웃음만 흐릿하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했다. 잉꼬 같은 동지였다. 그 시절엔 그랬다.

며칠 전 다퉜다
. 이과지망생 아들한테 남편이 너 카이스트 가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다. 세 명이 자살했을 시점이다. 나는 순간 발끈했다. (물론 성적도 안 되지만) 그 죽음의 소굴에 왜 아들을 넣으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남편이 자살은 어느 대학이나 있는데 한겨레가 부풀려 보도했고 그런 편향된 기사에 부회뇌동 한다며 나를 비난했다. 또 경쟁으로 애가 상처받는 게 싫으면서 왜 목동을 고집하느냐 따져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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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명시 / 성삼문

[올드걸의시집]

북소리 둥둥둥 이 목숨을 재촉한다.
고개를 돌이키니 해는 벌써 서산을 넘네.
황천 가는 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 뉘 집에서 이 밤 새울꼬.

- 성삼문 <절명시>




Beethoven's Tempest Sonata -- Wilhelm Kempff


 

외로움과 다툰 어제 하루. 김광석을 듣고 빌헬름 켐프도 듣고. 유하의 세상의 모든 저녁을 읽고 성삼문 시조도 읽어 보고. 술 마시면 글을 못 써 술을 안 마셨는데 글도 못쓰고 잠들었다. 주막 하나 없는 삶에 실망한다. 내가 예전에 클린트이스트우드 등 중장년 예술인에 환호하면 늙은 사람만 좋아한다고 친구들이 구박했는데 저런 깊고 순수한 눈빛과 치열한 파장만이 나를 사로잡는다. 외로움이란 인간의 표정을 아는 사람. 이해가능성 바깥의 세계를 열어주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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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따라 남고에 가다

[차오르는말들]

남고를 처음 가봤다. 생후 40년 만에. 운동장에는 푸르딩딩한 수박색 추리닝을 입은 남학생들이 공을 차고 있다. 인조잔디가 깔리지 않은 흙바닥에 구름먼지가 인다. 전봇대만한 아이들의 그림자가 뒤엉킨다. 완전 어른이구나. 남고가 꼭 군대같다고 생각한다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강당으로 간다. 넓은 공간이 꽉 찼다. 평일 오후인데 양복차림 남자가 많다. ‘요즘은 아빠가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다더니 이런 자리에도 온단 말인가새삼스럽다. 스크린이 내려오고 복잡한 도표와 통계치를 내민 입시현황을 보고한다. 서연고 정원이 몇 명 인서울 이과 문과 정원이 각각 몇 명. 그래서 우리학교 전교에서 몇 명이 서울소재 대학을 진학한다는 말씀이다. “이과는 2.5등급까지 경기권 대학에 들어갑니다. 문과보단 훨씬 나은 편이죠.” 

지난 겨울방학 때 동네학원에 갔다가 들었던 얘기다. 충격은 덜하다. 다만, 고등학교 진학부장과 대형학원 입시실장이 판박이처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놀랍다. 강당에서 교실로 이동했다. 책상만 덩그마니 놓였다. 휑하고 퀘퀘하다. “아우~ 니네 교실에서 홀아비냄새나~” 어떤 엄마가 아들에게 전화해서 코맹맹이 소리로 따진다. 담임선생님 인사와 면담까지 마치고 나자 6시다. 무려 네 시간을 머물렀다. 공포영화처럼 서늘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잔인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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