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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페미니즘 책 한권 보내주세요


숙소로 돌아온 아들이 군용배낭에서 '참치 캔 두 개와 수입과자 한 봉지'를 꺼내더니 서울 가면 여친에게 전해주란다. 열흘간 유격훈련 갈 때 마련한 비상식량인데 여친 주려고 애껴둔 것이란다. 낮동안 아들은 읍내에서 데이트를 했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여친에게 선물로 주려고했는데 배낭이 숙소에 있어 주지 못한 것이다. 


나로서는 그러니까 참치캔과 과자가 왜 선물이 되는지, 이 (흔한)게 뭐라고 주려는 거냐, 택배비가 더 나오겠다;;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거라도 주고 싶은 게 '군발이 마음'인가보다 싶어서 꾹 참고 있는데 아들이 덧붙인다. 


"엄마, 이거 보내면서 페미니즘 책도 한권 넣어주세요."


여친이 요즘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거 같다고 했다. 자기 동기가 방학이라 인턴으로 실습을 나갔는데 그 회사의 남자 상사가 "난 방학이 좋다. 젊고 예쁜 여학생들을 볼 수 있어서."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하며 여친이 속상해 하더란다. 그런 회사에서 나중에 어떻게 일하냐고.


난 파르르 흥분했다. 그것은 명백한 성적 대상화, 성희롱 발언이라고. 한 사람을 일하는 주체로 보지 않고 여자=직장의 꽃으로 보는 가부장적 발상이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차분차분 "저는 일을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나중에 꼭 전해주라고.


일상 곳곳에 가부장적 행태가 뿌리내린 현실은 콘크리트처럼 견고하지만, 그래도 여자들이 각성하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희망을 본다. 나는 우리 집에 있는 페미니즘 책 중에서 가장 얇고 쉬운 것으로 골라서 택배 상자에 고이 넣어 소포를 부쳤다. 이틀 후 아들 여친에게 문자가 왔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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