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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기억,기록

말들에 체하다

일년에 한두번씩 종일 누워지낸다. 대개는 전날 과음하고 다음날 머리 아파서 꼼짝 못하다가 토하고 토하고 토하고 해질녘 깨어난다. 요즘은 연례 행사 과음 대신 날마다 맥주 일캔씩 혼술이 늘었다. 그래서 숙취로 앓아 누울 일도 없었는데 어제는 체기로 숙취같은 고통의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렸는데 커피가 썼다. 커피를 남기고, 속이 답답해서 박하차를 마셨다. 새벽부터 편의점 알바 다녀온 아들 떡국 끓여주고 냄비에 남은 걸로 끼니를 때웠다. 책상에 앉아서 지난주 제주 어르신 인터뷰 녹취를 푸는데 자꾸 한숨이 났다. 머리가 아파 누웠다. 전날도 전전날도 10시간씩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 후유증인가 싶어 일어나 장을 보러 갔다. 과일을 사고 나오는 길 계산대 옆에 아이스크림 통에서 '월드콘'이 보였다. 

월드콘! 어제 호식샘 추모제에서 고인이 생전에 월드콘을 좋아했다는 얘길 들었다. 활동보조인이 "호식이 형과 힘들게 책을 읽고 먹던 월드콘" 얘기를 들려줬었다. 난 호식샘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월드콘을 샀다. 나도 월드콘 먹고 힘내서 원고 써야지 했다. 근데 월드콘은 왜 이리 큰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버릴 수 없어서 억지로 다 먹었고 집에 와서 다시 컴퓨터 앞에서 제주 어르신 원고를 정리하는데 또 부대꼈다. 부엌일을 하면 괜찮을까 싶어 딸내미 간식을 챙겼다. 사과를 깎다가 한쪽 먹고, 바나나도 맛을 좀 보았다. 내 몸은 침대로 자동이동.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옷을 입고 나갔다. 약을 지어 먹고 껌을 씹으면서 속을 달래고 경의선공원길에서 삼십분 앉아서 산책나온 품종 좋은 개들이 뛰어노는 걸 봤다. 어슬렁정거장에서 도착해서 감잎차를 마셨는데 자꾸 엎드리고 싶었다.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감잎차가 들어가니 또 속이 울렁거려서 화장실에 갔다. 마저 게워내고 났더니 좀 시원했다. 기적처럼 7시반부터 괜찮아져서 학인들 글을 읽고 말을 했다. 다행히 눕거나 엎드리고 싶지 않았고 웃겨서 웃었다. 수업을 잘 마쳤다. 무사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대해 아무래도 난 낭만적인 자세로 임했다. 약자들의 말이 들리는 세상을 그렸고, 자기 언어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전달자 역할을 하길 바랐고, 덤볐다. 그랬는데 용량 초과였던 모양이다. 내 몸이 게워낸 걸 보니. 그러니까 호식샘의 말들과 제주 어르신의 말들과 세월호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말들과 토요일 울먹이던 아이들의 말들과 학인들의 말들과 그리고 리베카솔닛의 말들이 속에서 뒤엉킨 거 같다. 그 삶들이 낳은 너무 많은 말들이 몰려왔고 너무 많은 한숨이 들려왔고 너무 많은 눈물이 밀려왔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응시하는 게, 삶에 겁먹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버텨내는 게 의지나 사상이나 신념이 아니라 체력의 문제인가 보다. 기억할 것이 많은 4월, 밀려오는 것이 많은 4월, 조심해야한다. 구토조심의 달. 


먼지 위에 쓴다

손가락을 담근 물의 속살에 쓴다

진흙 위에 쓴다 성에 위에 쓴다 

번쩍이는 청동거울 한 가운데 쓴다

모래 폭풍에 휩쓸려가는 글자들 

버스를 타고 소풍을 갈 때 

앞에 앉은 아이가 창밖으로 놓친 모자를

뒷자리의 아이가 잡아챘던 것처럼

클릭, 하지 않으면 

꼬리를 보이며 사라져가는 글자들

그래서 누군가는 지금도 

꽁꽁 접은 종이쪽을 박아넣고 있다 

웅얼웅얼 돌아서서 기도하는

오래된 돌벽 틈새로  


-'쓴다' 김연숙 시집 <눈부신 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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