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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그게 왜 궁금한 거죠?


“세상에 저런 일이 어딨어.” 아버지는 TV를 보면서 늘 말씀하시곤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말도 꼭 덧붙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세상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지? 말도 안 된다면서 굳이 보면서 욕하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자라서 세상에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백발 성성한 아버지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온순한 시청자가 됐다. 

아랫집에 사는 60대 초반의 어르신과 엘리베이터에 가끔 동승한다. 오전에 눈곱만 간신히 뗀 몰골로 대파가 삐져나온 장바구니를 들고 있을 때도 보고 저녁 강의를 마치고 노트북 가방 멘 채 밤 12시에 마주치기도 한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하루는 남편이 말했다. “아랫집 아저씨가 당신 무슨 일 하느냐고 물어보더라.”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지난 성묘 때 친척 남자 어른은 내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길래 성묘에 빠지)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단다. 그들에게 나는 남편을 경유해서 존재하는 ‘안사람’이다. 

“무슨 일 하세요?” 가끔 눈앞에서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그게 또 꼭 유쾌한 건 아니다. 글 쓰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소설가냐, 시인이냐, 방송작가냐 직업 유형을 대가며 되묻는다. 자동반응이다. 문창과 나왔냐, 국문과 나왔냐, 신방과 나왔냐는 질문도 곁들여진다. 글쓰기 수업 버전도 있다. 소속을 물어온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한다고 말하면 그게 어디냐, 누가 듣느냐, 무슨 과정이냐 묻고는 마지막 질문은 꼭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런 일 하고도 먹고살 수 있어요?” 

그 말은 그 옛날 아버지의 말씀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의 리메이크처럼 내게는 들린다.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서 이해하기 위한 말 건넴이 아니라 바깥에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 위한 말 던짐이다. 달갑지 않다. 먹고살 수 없으면 생활비 대줄 거냐고 따지고 싶은 심술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그들은 왜 질문하는 자리에 있고 나는 왜 쩔쩔매며 답하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 저 질문(의 형식을 띤 모욕)하는 자리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나와 글쓰기 공부를 하는 학인들도 자주 하소연한다. 어떤 이는 대학교 3학년에 자퇴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만 하고 있다. 어른들은 물론 친구들조차 ‘재입시’로 추측하거나 아니면 철없는 ‘한량짓’으로 본다며 심지어 ‘집이 부자구나’라는 말도 듣는단다. 자기는 한량도 부잣집 자식도 아니고, 취직하거나 대학원에 가는 친구들을 보면 불안감에 흔들리는 존재지만 그래도 지금은 자기를 내버려두는 중이라며 주변의 몰이해를 안타까워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허수경). 명함과 소속이 없으면 이리저리 치인다. 직장 다니는 여자가 살림하는 건 당연시하지만 살림하는 여자가 공부하는 건 수시로 이유를 추궁 당한다. 학위와 등단과 취직을 위한 공부가 아니어서, ‘그냥 글 쓰고 싶은 삶’이어서 나는 긴 세월 난감했다.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몸으로 겪었다. 내가 책을 냈다고 했을 때도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이거였다. “어느 출판사예요?” 

사람이나 책이나 이름 대면 알만한 반듯한 명패가 방패가 되어 주는 세상에서, 불확실성의 살아가기로 버티려면 아버지들의 말씀을 반사시킬 질문 카드라도 한장 준비해야 할까 보다. "근데 그게 왜 궁금한 거죠?"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