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의 눈물

[사람사는세상]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도 다른 것을 본다. 속되게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말하고 폼 나게는 ‘관찰의 인문학’이라 칭한다. <관찰의 인문학>이라는 책이 있다. 각기 다른 12명의 사람이 같은 상황을 자신의 직업적 관점에서 다르게 바라보는 경향을 담은 보고서다. 정신과 의사는 아내부터 슈퍼마켓 점원까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병적 증상을 읽어내고 시각장애인은 거리에서 주파수의 진동을 느낀다. 이런 현상을 프랑스인들은 ‘직업적 왜곡’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활자에 애착이 있는 나는 간판에 눈길이 절로 간다. ‘나폴레옹 제과점’ 같은 위용에 찬 이름은 대로변에서, ‘스티브 잡술’ 같은 재치 있는 간판은 홍대 부근 삼거리에서, ‘김밥군 라면양’ 같은 알콩달콩 간판은 여고 앞 2차선 도로에서, ‘정다방’ 같은 우직한 이름은 시장통 안으로 들어가는 마을버스 길에서 만나는 표정이다. 가지랑 호박 같은 채소를 파는 노점상 할매의 치마폭만한 상점은 ‘한 소쿠리 이천 원’이라고 쓴 삐뚤빼뚤한 매직 글씨가 그대로 간판이다. 자기를 내세우는 억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네모난 얼굴들. 간판을 통해 주인장의 삶의 내력과 가치관, 취향이나 욕망을 점쳐보는 일은 나의 오랜 취미다. 


요즘은 이 재미난 간판 놀이의 낙이 줄었다. 알다시피 카페, 음식점, 미용실, 호프집 등 프렌차이즈 업체가 거리를 죄다 차지했기 때문이다. 상호도 서체도 색깔도 획일적이다. 개성 있는 주인장의 숨결은 느낄 기회가 드물다. 그런데 이 몰개성적 풍경보다 더 섬뜩한 건 간판 아래 붙은 글귀다. ‘야간진료 개시’ ‘24시간 영업’ ‘22시까지 영업합니다’ ‘새벽 2시까지 배달 가능’ 같은 과로하는 문구들. 밤의 고요를 몰수하는 언어들.  


밥집, 패스트푸드점 같은 음식점 심야 영업은 그래도 불가피하다 싶었다. 대리운전 기사, 학원 강사, 직장 당직자 등 끼니를 때워야 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치과를 중심으로 병원 야간진료가 늘어날 때는 의사들도 경쟁이 치열한가보다 했다. 병원의 주요 고객이 야근하는 노동자들일 테니. 그런데 배고파서 먹어야 하거나 아파서 치료해야 하는 다급한 일이 아니라면 납득이 되질 않는다. 왜 밤 10시까지 옷가게는 불을 밝히고 핸드폰 대리점은 문을 열어야 하는지. 카페의 의자도 엉덩이의 무게를 덜고 좀 쉬어야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며칠 전에는 지하철역 근방 미용실에서도 보고야 말았다. ‘24시까지 영업합니다.’ 간판 하단에 작은 글씨가 아니라 아예 벽면 통유리에 대각선으로 상호명보다 크게 붙여놓았다. 저건 심야 미용실? 내 눈을 의심했다. 늦은 밤까지 머리를 말고 있을 ‘미용노동자’나 머리를 맡기고 있을 ‘어느 노동자’를 생각하니 아찔했다. 미용실은 온종일 서서 일하는 곳이다. 자동차 생산라인처럼 착착 돌아가는 작업장이 아닌 업무의 시작과 끝이 모호한 일터에서 교대근무가 확실히 이뤄질 리 만무하지 않은가. 심야노동을 마치고 불은 누가 끌까. 병원 야간진료의 초과노동도 간호조무사 같은 조직의 가장 약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착취의 역사가 그랬다. 


‘마음의 뒤쪽에선 비가 내리고

그 앞에는 반짝반짝 웃는 나의 얼굴’ (최승자 ‘북’ 부분)


간판은 울고 있다. 예전의 간판이 삶의 정취와 관계를 담았다면 이제는 삶의 경쟁과 과열을 내세운다. 과중한 삶에 간판들이 눌려간다. 과로한 간판에 삶이 휘어간다. 눈 떠보니 이리 되었다. 음식점, 병원, 옷가게, 미용실 등 야간노동의 경계는 업종 불문하고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출근하면 노동자이고 퇴근하면 고객이 되는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부려먹고 있는 슬픈 형국이다. 야간진료, 24시, 연중무휴가 길가를 점령하고 로켓배송, 총알배송, 당일배송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곳에서 내가 느끼는 현기증은 ‘직업적 왜곡’일 뿐이런가.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