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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옆소극장

내일을 위한 시간 - 산드라의 변신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 첫 구절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된 자신에 대한 경악보다 출근 걱정이 앞서는 뼛속까지 노동자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 반응은 제각각이다. 엄마는 기절하고 직장 상사는 기겁하고 아버지는 주먹으로 위협한다. 여동생은 벌레 오빠를 받아들이고 음식을 챙겨준다. 하숙인은 집안에 벌레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임대차 계약 위반이라며 하숙비를 내지 않겠다고 잇속을 차린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도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회사에서 전화가 한통 걸려오고 산드라는 자신이 해고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눈 뜨니 해고자다. 이를 안 산드라는 생계 걱정에 눈물샘이 터진다. 당연히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재편된다. 남편은 극진히 보필하고 몇몇 동료는 같이 웃고 울고 또 다른 친했던 동료는 싸늘하게 등 돌린다.

 

사람에서 벌레로 혹은 정규직에서 해고자로. 두 가지 경우 모두 생계가 위태로워진다는 점에서. 즉 인간의 지위를 박탈당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또 변신 ‘이유’보다 변신 ‘이후’ 전개 상황을 비중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21세기 판 <변신>으로도 읽힌다.

 

영화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산드라는 우울증으로 병가를 낸 노동자다. 한 사람쯤 빠져도 공장은 잘도 돌아가는 법. 이를 놓칠 리 없다. 사장은 산드라의 복직과 상여금 중 양자택일을 제안하고 남은 직원들은 상여금을 택한다. 이 과정이 공정치 못했음을 전해들은 산드라는 재투표의 기회를 얻어내고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영화의 원제) 동안 동료의 집을 찾아다닌다. 복직에 투표해달라며 바짝 마른 입술을 뗀다. ‘결과적으로’ 돈 대신 나를 택해달라는 요청인 셈인데, 이 과정이 담력 훈련처럼 혹독하다. 산드라는 자기가 동정을 구걸하는 거지가 된 거 같다며 주저앉고 남편은 옆에서 일으키고 독려하며 ‘완주’를 돕는다.

 

내내 속상했다. 심약한 아내한테 왜 저리도 고난의 행군을 고집하는지. 애초에 이런 몹쓸 구도를 짠 사장에게 항의하는 사람이, 남편 포함 동료는 왜 아무도 없는지. 산드라를 복직시키고 상여금도 달라! 회사 정문에서 일인시위라도 했으면 후련했을 게 아닌가…. 물론 그랬으면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토록 울림 있는 영화가 되지 못했을 거다. 만약 <변신>이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한 분투기라면 고전이 되었을까.

 

상실은 삶의 근본 속성이다. 허물고 앗아간다.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사유해야할 것은 소설과 영화가 말해주듯 변신 이후, 해고 이후, 그러니까 상실 이후 달라지는 것들에 대한 받아들임, 성찰적인 태도, 살아가는 용기다. 수락하지만 투항하지 않는 것.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고나서 ‘이렇게도 힘든 직업을 택하다니’ 라며 이전 직장생활을 낯설게 바라보듯, 산드라도 해고된 이후 일과 사람 관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얻는다.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선’(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 그녀. 산드라의 변신이 반갑고 뭉클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