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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더 뺄 것이 없어야 좋은 글

 

시간의 파도가 삶에 어떤 무늬를 만들어놓는가를 생각하면, 참 신비롭습니다. 얼마 전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없던 욕망이 생겨나고, 이랬는가했던 마음이 저렇게 돌아누워 버리는 게 순식간이고. 이 알 수 없음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는 글을 쓸 수 있는 거겠지요. 이런 생의 얄궂음이 아니라면, 그동안 인류보고서에 의해 확증된 경우의 수가 삶의 전부라면 시시해서 살 수 없을지도 몰라요. 포도송이 하나에 매달린 포도알의 모양이나 빛깔도 똑같은 게 없다는 데 말이죠. 각자성으로 존재하는 삶. 어설픈 느낌, 부서진 기억을 복구해나가면서 글을 써나가다 보니 마음만큼 뜻한대로 써지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요.

 

 

천연나방님의 수줍고도 당당한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알고보면 남친으로 인한 사유의 변화들. 40년 간 성처럼 쌓아왔던 사적소유-관계정성에 대한 가치의 흔들림을 발표하면서 고개를 조금 비켜서는 예전엔 안 그랬어요.”하는 모습이 새색시처럼 예뻐 보이셨어요. 아직 혼돈의 와중이라 그런지 글의 전개가 반복적입니다. ‘소유개념이 크고 헐거워서 메시지 전달이 명료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 혼란스러움이 이 글의 매력이자, 필자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병원()의 외적 성장, 남친의 아이들과의 조우. 이것을 바라보면서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로 정의내리고 눈여겨보는 시선이 신기하고 좋습니다. 앞으로 10. 건강한 소유, 관계의 돌봄으로 생의 정원을 가꾸어나가는 천연나방님 모습을 그려봅니다.

 

 

맑음님의 글은 특유의 정서가 있어요. 글에서 배어나오는 서늘함의 서정. 나긋한 광기 같은 느낌. 연기파 악역배우 같기도 해요. 어느 것도 거짓은 아닐 것 같은 여러 표정들의 공존. 이번 글이 좋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보는 것처럼, 적막함의 흐름이 좋네요. 숨죽이며 조용히 따라 읽었어요. “나는 저 미친듯한 날갯짓이 참을 수 없어진다.” “저렇게 아무 기회도 없이 죽으려고 살아남은 건 아니어야 한다. 이번엔 내가 미친 듯 수조를 흔들어댄다.” “사는 일도 죽는 일도 소름이 끼친다. 나는 뭐에 홀린 듯 수조 안 단단히 붙은 알들을 정신없이 긁어낸다.” 여기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돋보입니다. 마지막 중얼거린다는 좀 작위적인 느낌이 있어 아쉽고요. 계속 일상의 단편을 모아본다면 21세기를 사는 도회여성으로서 개성 있는 인물상이 그려질 것 같아요.

무한 글감을 가진 초롱샘. 수학공부 하는 엄마, 라는 제목 좋아요. 영재교육 현장에 몸담은 초롱샘만 쓸 수 있는 글이고요. 소재와 주제를 잘 담아냈습니다. 초롱샘의 글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단점인데 자칫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하죠. 샘이 글이 늘지 않고 재미도 없는 거 같다고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를 만들어가면 됩니다. 사유의 넓이와 깊이는 금세 형성되지 않으니 꾸준함으로 임해야겠지요. 이 글에서는 현아 엄마에 비해 현아의 캐릭터 묘사가 아쉬워요. ‘수업시간에 현아의 태도를 생각하면 어떻게 뽑혔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하셨는데 태도가 어떤지, 표정, 말수, 신체적 특징 같은 것들이 주어져야겠죠. 수학문제를 외우려고만 한다는 정보만으로 아쉽습니다. 엄마의 풀지 못한 한과 욕망이 어떻게 광기로 변해가서 아이를 날마다 조금씩 시들게 하는지 아프게 보았습니다. 현아가 너무 가엾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는데, 뭐라도 해야겠어서 시작했어요.’ 선미샘 글의 첫 문장이 좋은데 중간에 몇 번 더 나오네요. 이 글은 중복된 내용을 빼버리고 날렵하게 만드는 게 관건입니다. 강북의 수유역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김진영씨만 가진 고유한 특징과 정보로 글을 구성해주세요. 가령 시민단체 '리멤버0416'의 회원이며 세 자녀를 둔 워킹맘이며 퇴근 후 매일 한 시간씩 1인 시위를 했다고 한다는 것. 그녀만이 겪는 일들이 있습니다. 남자 (신웅철)씨에 비해 시비를 걸고 위협을 가하는 남자가 많다는 거. 중학생 아들과 같이 시위하면서 겪은 일화, 친언니의 죽음으로 인한 인식의 변화는 글을 무척 생생하고 뭉클하게 합니다. 반면에 마지막 문장, 자식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비유- 심장을 밖으로 꺼내놓는 일이다-는 사족입니다. 다음 문장으로 마무리하면 되겠어요. “내주변의 누군가 고통 받고 눈물 흘릴 때 침묵하고 외면만 한다면 내가 고통으로 눈물 흘릴 때 과연 누가 나와 함께 해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참여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벽이 없어지고, 기막힌 일이 다 있군요. 기댈 곳, 숨을 곳, 울타리는 삶의 기본 테두리인데 말이죠. 이슷 글의 공간적 배경이 늘 흥미로워요. 살지 않으면 시선이 닿지 않는 곳. 도시의 좁은 골목에 붙어있는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 세입자의 분노를 구조적으로 풀어내려는 노력 등이 진지하고 재미져요. 언젠가 썼던 월세 잔혹사; 비슷한 글이랑 이 글이랑 이어붙이면 월세르포르타주 나오겠어요. ‘이 휴지는 포장에서 교묘하게 대기업 상품의 이미지를 내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 어쩌면 이것이 이 문제의 본질이다 싶다.’ 이 부분은 뭐죠. 대기업 이미지 도용이 왜 이 문제의 본질인지는 이해가 어렵네요. ‘그놈들은 왜 하필 휴지를 생각해냈을까? 보드라움 때문이다. 보드랍게 입을 틀어막을 수 있으니까. 얇디얇은 경계면, 이웃, 정 같은 보드라운 것들을 연상시키는 그것.’ 이 해석은 독창적이라 좋고요. ‘법적절차라는 말에 시작된 벽을 둘러싼 싸움이 어떻게 진행될지, 연속극 보듯 속편을 기다립니다.

 

 

 

 

나는 인기척만으로 그녀의 행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가까웠지만 가깝지 않았다.’ ‘나는 그녀 덕분에 자본주의와 노동에 대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어떤 연애 상대보다 더 깊이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와 나를 한 세트로 여겼다.’ ‘그녀의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이고 존재일까.’ 이런 진술만 모아놓고 보면 흡사 연인에 관한 글이죠. 한 사람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고, 공부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사람. 애와 증의 관계가 사실적으로 감정적으로 무척 잘 드러납니다. 나직한 톤으로 글을 끌고 가는 힘이 있어요. 흐리게 웃는 선유님 표정처럼 글도 매력적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오랜 탐구는 곧 자신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지요. 배에서 재빠르게 탈출하지 않고 살아남아서 인간이해를 실천하시니 선유님의 견딤은 헛되지 않았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내면탐사의 전문가가 여름날 동창생과 등산로의 글을 쓰자니 그렇게 겉을 맴돌았나봅니다. 톰슨가젤님의 등호의 나열 같은 고요한 자기진술의 문장들이 쓸쓸하다가 섬뜩하다가 그러네요. ‘모든 글자가 균일해야 했다. 펜의 종류도 잉크의 농도도 달라서는 안 됐다.’ 이 대목은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탁 막힙니다.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고 글을 쓰는 과정이 불안과 집착에 휩싸인 자기에게서 빠져나오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미 나왔고요. ‘상처가 나와 다른 세계가 만나면서 생기는 것이라면, 나는 그게 싫어서 자꾸 내 안으로 빠져든 게 아니었을까.’ 이런 자기진단을 보면요. 영화 속 주인공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연결지어 글로 풀어내는 솜씨가 좋습니다. ‘거짓과 속임수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에의 의지를 비판하고 가상의 힘을 말한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가상이든 진실이든 자기 삶을 위해서, 삶의 유용성 전략으로 택해야지 그것에 짓눌리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마지막 마무리 아쉬워요. 삶의 맷집은 나이로 생겨나는 게 아니므로, 나는 이제 잃을 것도 없으니 몸을 던져볼 때도 됐다는 다짐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다짐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무엇도 달라지게 하지 못하니까요.

 

 

 

 

세상은 석연치 않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얼마 전 지하철 역 엘리베이터 증축 공사현장 앞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이런. 이 세상에 석연찮음이 하나 더 늘었군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공사장의 로봇에서 틱장애를 발견하는 안목이 놀랍습니다. 사물에 대한 투명한 시선. 벌꿀님의 동화적 언어구사가 정말 매력적으로 드러난 글입니다. 그간의 글들을 돌이켜보고 계열을 만들어 본다면, 그 글들의 모음이 어떤 표정을 지질까 궁금합니다. 단순히 문체와 사유의 고유함에서 밀고 나아가, 이 글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를 얻을 것인가. 누군가 너는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물었을 때, 한마디 벌꿀처럼 투명하고 끈적하고 뜨듯하고 늘어지고 달디단 어떤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의 단서를 만날 수 있는 글을 아직은 못 본 것 같습니다. 구지가를 불러봅니다. ‘머리를 내어라. 만약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수업이 두 번 남았습니다. 그동안 더 친하게 지내요. 9차시, 10차시 수업 후 데이트 신청합니다. 같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기. 남은 정 살뜰히 소진하고 헤어지고 싶네요. 우선은 달맞이 잘 하시고, 잘 쉬시고요, 914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