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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D에게 보내는 편지_과제 리뷰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가지는 꼭 알고 가야한다고 어느 분이 그러셨어요. 내가 누구인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저것 중에서 자기체험을 가장 강력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연애사건이 아닐까요. 사랑에 빠진 신체는 말랑말랑하죠. 언어와 감각과 자연에 극도로 민감해져요. 아기살처럼 약한 자극에도 자국이 남고. 사소한 일에 눈물도 웃음도 헤퍼지고. 알고 싶고 만지고 싶고. 사랑 이전에 감정표현 능력이 아역배우처럼 대여섯 가지에 불과했다면 사랑 이후에는 노련한 대배우처럼 감정의 복잡한 결까지도 느낄 줄 알게 되고요

 

 

느낌 아니까요즘 이런 유행어가 있던데요. ‘느낌이 활성화되면 욕심이 자라납니다. 니체가 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했는데, 사랑하면 바로 원할 줄 아는 자, 욕심꾸러기가 됩니다. 타인으로 인해 나의 결핍을 메우고 싶어 하는 게 사랑이라면요. 암튼 그 원함이 생의 의지가 되어 자아가 확장됩니다. 고르와 도린의 러브스토리를 담은 책 <D에게 보낸 편지>에도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에 깨어있고 서로의 삶에 욕심내는 게 잘 드러나죠.

 

 

당신은 내게 누누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삶은 글을 쓰는 거예요. 그러니 글을 써요.” 내 소명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당신의 소명인 것처럼요.(48)

 

 

이 부분 읽을 때 부러웠어요. 신뢰할 만한 사람이 옆에서 저런 얘기 주기적으로 해주면 사는 일에 큰 힘이 되겠죠. 도린이 병을 얻어 생태주의와 기술비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진술도 그렇고요. 두고두고 매일의 논쟁과 실천을 함께 하면서 불안과 갈등의 자식이 서로의 본질이 되는 관계가 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랑의 러브, 운명의 데스티니 아닌가요. , 이처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여된 양도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인데, 사랑이 어렵죠. 공부와 스펙과 취업과 양육과 생계에 시달리느라 청춘 다 저뭅니다. 사랑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 같지만 사랑-결혼(에 대한 해석)은 사회문화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사랑에 대한 과제물을 보면서 자기감정선, 그러니까 희비의 쌍곡선을 따라간 글이 많았는데 그래서 편안히 술술 읽혔던 만큼 각자 존재 조건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데는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도 어려운 부분인데 같이 노력해보아요. 궁극적으로 글에는 문제의식이 분명해야합니다. ‘내가 이 글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은가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지향은 둘 중 하나가 되어야겠죠. 조금 더 냉철하게 큰 틀에서 보든가 아니면 아주 사무치게 심연을 파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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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재

무재의 표를 읽는 일인입니다. 그것도 뚫어져라 봅니다. 이제야 안 사람과 바깥사람이란 용어에 익숙해지네요. 고통의 생성에 관한 글에서 중간 제목이 크게 세 개에요. 1. 안사람과 바깥사람의 기능 2.원치 않음의 생성 3.밀실의 팽창. 각각의 중제만 모아도 글의 주제가 드러나는 게 좋습니다. 이를 테면 안 사람과 바깥사람의 분열이나 원치 않음의 생성, 혹은 밀실의 팽창에서 고통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더 일목요연하겠지요.

 

 

- 안사람은 나의 자발성과 능동성, 욕구, 직관에 따르고 눈을 가지고 나 이외의 세상을 본다. 그 결과 외부대상이 주어졌을 때 자발적인 생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 개인은 이 모든 압력을 다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표상된 세계관를 통해 압력을 의식하면서 살게 된다.

-> 이런 개념으로 된 문장을 쓸 때는 일화로 사례를 들어주세요. 그러면 무재도 논리를 전개하는데 더 정교해지고 도움을 받을 거예요.

 

 

- ‘어떻게 고유성을 보존하려는 a가 스스로를 이렇게 파괴할 수 있지, 어떻게 밀실에서 이렇게 타동적일 수가 있지’, 하고 안 풀리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이고, 이렇게 쓰는 게 맞다, 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유가 확연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 이런 문장이 사례를 든 건데 조금 더 정교해야 해요. 의지대로 글이 안 써지는 게 밀실에서의 타동성 때문일까요? 여튼 응원합니다. “미래의 스피노자의 딸 무재 파이팅~”

 

 

 

* 이슷

이슷은 고통이란 주제로도 참 쿨하고도 집요하게 쓰는구나 싶어요. 읽어 내려가면서는 도대체 어떤 고통에 관한 글일까?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한숨 나고 화도 나네요. 미워하는 사람에게 원한 감정을 팍팍 티내지 못하는 것, 가치와 일상의 충돌,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죠.

 

 

소설 같은 묘사 위주의 생생한 문장들, 등장인물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이 이스트 글에 특기이자 특징이죠. 그런데 상황전개가 시공간적으로 속도감 있지 (부자의 경우처럼) 않으면 지루한 경향이 생기네요. 이번에 좀 그랬어요. 글의 긴장이 늘어지지 않게 중간에 쥐의 소행을 적당히 분량 조절 하거나 변화를 주세요. 자신의 혼란과 고민과 궁극적인 문제의식을 짚어준 것은 좋은데 마지막에 결론부에 몰켜 있으니까 조금 촌스럽죠? ^^ 묘사와 해석이 긴장을 잘 타면 황정은 문체처럼 이스트 문체가 담긴 소설도 가능할 듯.

 

 

- 나는 사회학적 교양을 갖춘 여성이므로 한 개인의 처지를 판단할 때는 언제나 사회 구조가 그에게 끼친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또 개인의 책임이 아닌 그가 놓인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주장해 왔다. 쥐가 미워 소리를 빽 지르고 싶다가도 그 놈의 '배치의 문제' '사회 구조 차원의 문제' 인지 나발인지가 언제나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자본주의를 척결할 대안으로 늘 공동체적 삶을 추구해 왔다.

 

 

 

* 맑은샘

- 사랑은 아무하고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은 ...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 “나는 너라는 십자가를 항상 짊어지고 산다.”

첫문장과 끝문장이 매혹적이에요. 필자의 애정관과 결혼관이 동시적으로 드러나는데, 아쉬워요. 더 부연설명 해주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홍엽님이 남편님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 갈등 등 사례를 들어준다면 독자가 저 말에 공감하겠지요. 또 남편님이 왜 어떻게 홍엽님을 십자가로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해요.

 

 

중간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서 호기심과 호감을 느끼고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나오는데, 여자는 왜 남자의 가정적이고 따뜻한 면모가 좋았는지 궁금합니다. 내밀한 심리묘사나 생생한 애정사건이 전개되면 판소리처럼 구성지고 파워풀한 글이 되겠습니다. 남편님 안 볼 때 대낮에 꼭 한 번 글 써보세요.^^

 

 

* 맑음

 

 

- 하얀 보시기에 오이소박이 푸지게 담아내고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내는 살뜰한 내가 되지요.

 

 

이 부분에서 군침 꼴깍 삼키고 들어갔습니다. 푸짐한 오이소박이 먹고 싶어서 혼났네요. 초반에 평범한 일상과 대비되어 중반부에 내면의 혼란이 더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 당신이라면, 저렇게 고운 눈이라면 내 안의 시끄러운 세상과 마주칠 리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요...나는 날카롭지 않은 당신 눈빛에 안도하고 꿈꾸지 않는 목소리의 안정을 더듬었지요. 나를 가늠하지 못하는 남자. 일어서고 나니 지쳐 웅크린 당신이 보여요.

 

 

발표글의 속편처럼 보이는 대목이에요. 이전 글의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모호하고 막연한 내용이 될 텐데요. 과제글은 연습 삼아서라도 한 편 한 편 그 자체로 완성도 있게 써보세요. 이번 글은 추상에서 구체로진전됐습니다. 살이 많이 붙었고 문장과 표현도 더 날카롭고 글에 전반적으로 긴장도 흐르고 좋습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에 입각해서 사례의 비중을 늘여주면 간혹 있는 사유 부분도 까만 밤의 별처럼 더 선명히 빛날 거예요.

 

 

 

* 구카

왜냐면 완벽한 남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당신에게 완벽한 그 남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이 문장이 무슨 암시처럼 보여요. 짧은 글에 공개된 몇 개의 정보만으로도 구카에게 완벽한 남자구나 싶으니 말이죠. 역시나 진한 애정표현인데도 질척거림이 없으니 그 시크함의 비결은 뭘까요? 특히 이 문장.

- 당신은 퍽 시니컬한 편입니다.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고 싶지가 않아요. 내가 독점하고 싶은 당신의 세계를 다른 사람들이 주워 담고 즐거워할 생각에 질투가 납니다.

 

 

독점욕마저도 당당해보여요. 근데 왜 독점하고 싶은가요? 사랑에 문외한인 이들을 위해서 더 풀어써주면 좋겠어요. 그전에도 소유-독점욕이 많았는지, 그 남자 만나고 생긴 변화인지. 사랑 자체보다 사랑 그 이후의 변화가 중요하답니다. 그리고 시니컬이란 표현은 냉소적으로 바꾸는 게 더 안정적이죠. 대체어가 있다면 영어 표현은 가급적 안 써야 좋더라고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취향, 판단, 감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해 버립니다. 당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우위에 놓은 채, 그 논리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나를 보며 종종 놀라곤 합니다...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내 삶은 예술이 되어 갑니다.

-> 가슴 저릿하게 하네요. 특히 삶은 예술이 되어간다는 진술은요. 여기에는 필자가 생각하는 예술의 정의를 앞서 내려줘야 해요. 예술이란 표현이 좋은데 크고 모호해요. 느낌이 큰 표현이 글에서는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뭔가 달달하고 삼삼한데 그 단어 하나로 주제의식이 흐려져 버리기도 하거든요. 그거 아세요? 구카님 과제는 얼굴처럼 글도 웃고 있답니다. 아름다운 표현에 힘을 조금 더 실어주면 더 좋겠어요.

 

 

 

 

* 소리

별 하나, 별 두울. 별 시리즈로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하다니 소녀 같은 순수한 감수성이 배어나는데, 그래서 아쉬워요. 글을 다 읽고서는 로 표현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어요. 소리님만 볼 수 있는 별 같은 존재들이랄까. 글이 몽롱하고 모호해요. 이유는 ’ ‘의 반복적 사용이 가장 큽니다.

 

 

-너에 대해 많은 것을 몰랐더라도 나는 너를 좋아해왔을 것이다... 2011년 너와 함께 했던 4일 간의 포럼... 너는 그 때 내가 발견한 반짝반짝 빛나던 두 개의 별 중 하나였다...엉뚱하게도 오렌지 맛 치약이 갖고 싶다던 너를 위해 내가 구해 놨다.

 

 

-> 모든 문장에 나, 너가 반복적으로 나오니까 메시지 수용에 혼란이 오고 내용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흘러요. 이니셜을 쓰는 것도 방법이고 웬만한 것은 생략 가능합니다. 가령, 너에 대해 많은 것을 몰랐다, 그러면 도 실체가 없고 많은 것도 실체가 없습니다. 구체화해주세요. D에 대해서 나는 (신형철 글을 빌자면) 커피가 목 끝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 비오는 날 듣는 음악, 혹은 잠버릇을 몰랐다 등등 상상할 거리를 줘야합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너와 나의 삶이 맞닿아 있는, 삶을 사는 것. 솔직히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너나 나나 서툴고 미숙하며, 개성까지 강한 인간들이니까...나는 부대낌의 미학이랄까, 그 부대낌을 한 번 믿어보고 싶다. 그것은 사람을 믿지 못 하는 내가, 사람을 믿으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 실존에 관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위의 문장도 전부 추상적인 단어들이죠. 바라는 것, , 맞닿는 것, 미숙함, 개성, 부대낌, 믿음 등등이 일상에서 어떻게 그러한지를 풀어주어야 소리가 어떤 결핍에서 어떤 사랑을 갈구하는지, 둘 사이의 사랑에 어떤 장애가 있을 수 있고 나아가 극복 가능한지가 파악되겠지요. 모든 연애는 자기분석, 자기연마의 지난한 과정이기에, 소리가 모호함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을 응원할게요.

 

 

 

* 율마

- 그 사람을 중심으로 5미터 즘(->)은 다른 세상이다...나는 단지 느낀다. 당신이 그러하였음을. 그렇게 살아왔음을...그리고 믿기로 한다. 그냥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마침표를 찍자.

 

 

-> 이 문장 좋네요. 마법의 존을 왜 5미터로 설정했는지 궁금하면 멋없는 건가요? ^^ 율마님이 글을 시적으로 풀어내고 그 안에 밀땅의 긴장이 있어서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저는 여기서 더 파보면 좋겠어요. 파면 글이 더 맑고 깊어질 것 같아요. 의심이 이는 순간, 잠재우는 이유, 이기심이 발하는 순간 등등.

 

 

-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은 나의 중심에 그대를 놓아두는 용기임을.

-> 아름다운 마무리. 그러나 사랑은 위대할지언정 일상은 쪼잔하잖아요. 나의 중심에 그대를 놓아두는 게 음식점에서 메뉴 고르는 일부터 치약 짜는 위치까지 어떻게 구현되는지도 알려주세요. 궁극적으로는 율마의 글을 읽고 나면 사랑의 속성을 배우는 거죠. 사람을 사랑하면 마법의 존이 생기는구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잡념 없이 사랑하게 가능하구나, 아니면 그런 사랑의 과정에 이르기 위해 한 사람이 이렇게 바람과 대화하면서 자기단련을 하는구나, 나를 그대에게 놓아두는 게 어쩌면 가능하기도 하겠구나.

 

* 벌꿀

- 어디에 눈을 두어도 숨이 차다.

건너편 건물 빨간 간판에 한가득 씌어 있는 안주들은 무슨 종류가

저리 많은가. 탕수육부터 황도 만두탕 조개탕 골뱅이 빈대떡 오징어땅콩

이 모든 것들과 이것들 보다 복잡한 안주 다섯 개와 이것들보다

쉬운 안주 다섯 개는 더 있었다. 주방 아주머니가 굉장한 요리사인가 보지.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면 아직도 당신은 말이 없고 말을 꺼내니

고맙다와 고마웠다들이 서로 헤집고 다니는 테이블

-하얗게 바랜 3월의 시린 해를 쬐고 있다 보니 옛 연인의 혀처럼 붉은 자두를 가슴 아리도록 씹어 먹고 싶었네.

 

 

-> 참 시시한 사랑, 참 허무한 사랑을 얘기하는데 이건 헤어지는 날 풍경이고요. 사랑이 결론적으로 시시하고 허무하려면 이전의 극도의 절절함이 있어야하는 거겠죠. 그 얘기는 상상해야하는 건가요. (붉은 자두 한 알의 상징으로는 해소가 안 돼요.;;) 간판의 말많음과 테이블의 말없음처럼 절절함과 시시함이 대비되면 좋겠어요. 플래시백 기법처럼 후반부 어디에 나오면 더 탄탄할 텐데. 벌꿀님이 평소에도 글/말을 워낙 아끼시니^^ 더 내놓으라 요구하는 게 무리수 같지만 6기 수업 때 서사가 촘촘한 유년 글도 좋았거든요. 그 여운을 잊지 못해 그래요. 그리고 벌꿀님만의 문체가 더 중량감까지 있으면 더 멀리 빛나겠지요.

 

 

* alma

- “나에 대한 소설을 써.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 그대가 소설을 써서 k를 알 수 있었어요. 바흐 대위법과 칸트의 비유 정확하네요. 한 남자의 삶의 동선과 집안과 연애 생활이 그려져요. 그런데 alma의 욕망과 결핍은 잘 모르겠어요. 그와 사랑할 때 행복했다는 알겠는데 왜 그렇게 그 사람이 좋았는지, 그 사람이랑 있을 때 무엇이 채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없어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얘기인데요.

- 나는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우리의 시간을 복기하기 시작했습니다.

-> 상실의 아픔이 이 단정한 한 문장에 바둑알처럼 선명히 드러납니다.

 

 

- 나도 당신이 밝고, 맑고, 건강한 사람이라 좋아요. 그런데 내가 당신의 어두운, 우울한, 약한 모습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지요.

-> 현재로서 이별에 관한 최대의 단서로 보여요. 이 부분을 쓴물 다 나올 때까지 오래 곱씹어야 다음에 덜 아픈 사랑 할 테죠.

 

 

 

* 스말러

- 나는 진심과 진짜밖에 없는데 진심과 진짜가 아닌 것도 함께 갖고 있는 족속을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손해 보는 장사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 막 시작되는 사랑이야기에 볼이 빨개질 것 같아요. 제가 괜히 수줍어지네요. 정서 감염은 성공했어요. 진심과 진짜. 스말러님을 아는 우리는 뭔가 느낌이 오는데 모르는 독자에게는 모호한 표현이죠. 이 부분을 풀어서 묘사해주세요.

- 엄마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귀한 생명체처럼요. 내게 사랑을 게임처럼 하라 한다면 전 차라리 돌이 되겠습니다.

-> 이 표현에서 움찔 하네요. 울림이 있어요. 그런데 게임처럼 사랑하는 것과 반대는 뭘까요? 자연처럼 사랑하는 것?

 

 

- 오랫동안 사장시켜버렸던 삶의 품목이었건만 당신을 만나고 이렇게 부할시켜버리다니 제가 또다시 실수한건 아니겠죠?

-> 사장 시킨 이유, 실수를 가슴에 구겨 넣은 그것을 펴서 들여다보시고 글로 남겨보세요. 더 가지런히 정리해두어야 지금 사랑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확률이 줄어들거든요.

 

 

- 제가 느끼는 당신은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당신을 사랑해도 좋을까요? 당신은 제 운명인가요? 당신이 확실한가요?

-> 이 느낌도 글로 번역해보세요. 글쓰기는 느낌을 활자로 유려하게 번역하는 고되고 짜릿한 노동입니다. 그나저나 제가 괜히 "당신이 확실하다"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