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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사르트르_말_과제리뷰

#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사르트르 <>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첫 교재로 택한 이유는 유년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문입니다. 이 엄청난 말의 성찬, 말의 인플레, 말의 폭포수를 느껴보시라고요. <동무와 연인>에서 김영민이 그랬죠. 짐작컨대, 사르트르는 성행위를 하면서도 계속 떠들었을 것이라고요. 인간은 분자나 원자가 아닌 '이야기'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을, 본디 훌륭한 작가들은 보여줍니다. 글 쓰려면 자기 안에 수다가 많아야합니다. 풍부한 표현,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절차탁마의 영역이고요. 우선은 우리 몸을 이야기를 생성하는 24시간 공장의 신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작가는 경험+관찰력+상상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죠.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라는 말이 꼭 따라 붙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수능 세대들, 윤리 과목 선택이 아니었던 학인들도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는 단숨에 읊었습니다. 실존은 뭐고 본질은 뭔가. 실존은 인간이 이 세상에 먼저 존재하고(실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본질) 자유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우선 실존하고 그 후에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인간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 된다는 것. 이는 인간만의 특징이죠. 의자 같은 도구적 사물은 앉는다는 목적 (본질)이 정해지고 이 세상에 존재(실존)하니까요. 아무튼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대로 규정된다는 것을 표방한 실존주의의 상황 윤리는 꽤나 매력적입니다. 말하는 것이야말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문학관도 당시 문학도들에게 폭발적인 동의를 얻었다고 합니다.

 

인생은 B(Birth)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사르트르 어록이더라고요. 사르트르는 우리 세대에게 선택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열을 제시해주었다고 김윤식 문학평론가는 회고합니다. 사르트르는 <말>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이 결정됐는데 수상을 거부한 얘기도 유명합니다. 상을 받지 않을 것을 한 사르트르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보였습니다. 어떤 권위나 제도도 그것을 따르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때 유지되고 힘을 얻는 것인데, 사르트르는 권위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를 누리고 스스로 권위를 득했으니 진정한 강자로구나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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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이 찍은 사르트르)

 

 

# 질문과 대답

 

맑음님이 수업시간에 질문한 사르트르 할아버지는 작가가 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작가가 되었느냐는 부분을 찾아보았어요. 민음사 책으로 70쪽이네요. “할아버지는 내가 작가라는 이름의 그 중개자들에게 싫증 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얻은 결과는 정반대였다.” 전후 맥락에 따르면 할아버지의 작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있었고, 책은 어디까지나 다른 학문을 위한 수단일 뿐, 책을 흡입해서 더 나은 부와 명예와 지위와 학식을 얻기를 바랐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지금의 학부모들도 독서교육, 논술교육 시키지만 작가가 되기보다 책 읽는 판사, 책 읽는 의사 되길 바라듯이요.

 

 

# 과제키워드_ 유년

 

유년키워드 글로 들어갑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서 <집안의 천치>에서 삶이란 유년기에 갖은 양념을 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은재가 말한 벤야민의 말은 우리가 열다섯 살 때 알고 있던, 아니면 하고 있던 것만이 이후 어느 날 우리의 매력이 된다입니다. 광화문 교보빌딩 건물에 걸린 글귀처럼 내 안에 있던 그 작은 아이를 만나는 시간. 유년에의 탐색이 왜 중요할까요. 외부의 권위와 제도에 덜 억눌리고 간섭받던 시절, 본성대로 존재를 펼치던 날들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모습(가능성)을 보자는 취지입니다.

 

유년의 일화를 한 장면씩 그려주었는데요, 할아버지, 친구, 할머니, 엄마, 책 등 주변 환경이 한 사람의 성정과 기질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결국 한 존재는 무수한 관계의 앙상블입니다. 나의 말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주변에서 들은 누군가의 말, 읽은 책의 글귀의 혼합물인 거죠. 우리는 심하게 서로 영향 주고 영향 받습니다. 이왕이면 서로에게 좋은 주변인이어야겠죠수업 동안 온갖 말들, 과격한 이야기들 찬찬히 나누기로 해요.

 

 

<맑음>

- 사르트르의 명쾌한 자기 분석을 앞에 두고 나는 내 유년의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 소소한 단상을 풀자니 기만이고, 통째로 돌이키자니 터무니없이 무겁다. 평생을 유년의 총아로서 존재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유년기에 갖은 양념을 친 것이 삶이라면, 인생이란 그저 우연히 주어졌던 유년의 총체에 다름 아니라면, 유난히 지난한 유년을 보낸 내 삶이란 그저 총체적 난국에 불과한 셈이다.

 

-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에 놓인 어린 아이는 그 자체가 생존할 권리의 근거가 된다는 사르트르의 지적은 내게 있어 옳다. 나는 오로지 죽지 않기 위해 살았다...행하지 않음이 유년 시절 생존의 본능이었다면, 성년이 된 후론 배신과 원망을 위해 같은 삶을 되풀이했다. 세상을 향해 주먹질하듯 부동의 자세로 사는 것만이 나를 잉태하고 버려둔 이 세상의 신에게 돌릴 수 있는 나답고도 나약한 방법의 복수였다.

 

* 감상보다 줄거리 원칙을 거뜬히 넘어서서 감상으로 줄거리를 만들었네요. 문체가 힘이 있고 정언적인 문장과 표현이 돋보입니다. (유년이라는 관성의 배설, 비극의 조연, 이 정겨운 결핍들이 표현되고 싶어 두근거리는 세상) 그런데 이렇게 서사가 없이 감상 중심의 표현으로 글을 쓸 경우, 긴 글이 어렵습니다. 몇 편 쓰면 더 이상 쓸 게 없고 지속적으로 써도 동어반복처럼 보일 테고요. 적확하지 않은 비유가 남용될 경우 글의 신뢰가 떨어집니다. 또한 감상 중심의 글은 자기공감이지 타자공감은 한계가 있습니다. 글에 서사가 배합된다면 맑음님의 저 송곳같은 문체도 더 빛날 것입니다.

 

<소리>

- 나의 유년시절의 대부분은 평탄하지 않았다. '유년'이라는 시기가 나이 어린 한 인간의 삶이 그 사람의 선택이 아닌 보호자로 칭해지는 타자의 삶의 결정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던 시절을 뜻하기 때문이다. 내 부모의 재결합 이후에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연속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알맞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고, 나의 어른스러움에 갇힌 나는 과거에는 어리지 못했고, 현재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 한 인간의 삶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보호자로 칭해지는 타자의 결정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나의 유년을 보면 그렇다. ( )살 부모님의 재결합 이후에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의 연속이다. 나는 너무 일찍 철들었다. 어른스러움에 갇힌 나는 과거에는 어리지 못했고 현재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 사람의 이기적 기호 때문인지, 삶이 너무 힘들어서인지 '좋은' 기억은 언제나 흐릿한 기억력과 자신의 숨겨진 바람들로 인해 언제나 더 미화된다.

 

* 도입부 문장은 끊어 쳐요. 특히 두 번째 문장 너무 길어요. 중언부언 늘어지면 핵심이 잘 안 드러납니다. 할아버지 팔베개, 사과 이유식, 텃밭 가꾸기, 붓글씨 등 할어버지와 함께 한 시골생활은 충분한 사례가 나와 동화책 보듯 풍경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 서정적 일화가 의미를 가지려면 부모의 불화에 따른 유년의 불안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할아버지의 돌봄이 소리의 유년을 어떻게 형성했는가에 대한 해석을 곁들여주세요.

 

<sd> 

- 내 딴에는 어머니가 항상 그 친척 분을 말할 땐 항상 욕을 하였고 동네 아주머니와도 그분 욕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기에 어린 나는 아무런 의식 없이 그 분에게는 욕을 해야 어머니 편을 드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욕으로 답을 했던 기억……. 그 후로는 누가 아무리 그 사람을 욕을 해도 내가 함부로 그 사람에게 욕을 해서는 안 되는걸 알았다.

-> 어머니가 그 친척을 말할 때는 항상 욕을 했다. 동네 아주머니에게도 그 친척의 흉을 봤다. 어린 나는 그 친척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딴에는 그 친척에게 욕을 해야 어머니 편을 드는 줄 알았다. 그래서 욕으로 답한 것이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어떤 사람에 대한 험담을 들어도 함부로 욕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 문장을 주어+목적어+동사로 간단히 써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소개된 일화가 재밌어요. 엄마의 다듬어지지 않는 모습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지만, 나 역시 엄마가 되어서도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으로 결론을 내린 것,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거친 엄마의 모습을 보였던 일화도 써주면 분량도 늘고^^ 글이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되겠네요.

 

<김현미>

- 유년의 나에게는 꼿꼿하고 수염 허연 산신령 풍모의 할아버지와 동백기름으로 반듯한 가르마에 반들반들하게 빗어 넘긴 쪽진 머리가 단아하셨던 할머니가 계셨고 늘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과 일곱 남매들이 함께 있었다.

-> 할아버지는 늘 꼿꼿했다. 수염 허연 산신령의 풍모를 지닌 분이었다. 할머니는 반듯한 가르마에 동백기름으로 반들반들하게 빗어 넘긴 쪽진 머리로 늘 단아했다. (농사를 짓느라)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과 일곱 남매가 함께 살았다.

 

-심지어 외갓집까지 한 동네에 있어 엄했던 외할머니와 외삼촌, 외숙모, 외사촌들. 동네 가운데 있던 우리집은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몰려드는 사랑방 구실로 동네 친구들 역시 모두 내게 풍요의 한 자락을 나눠 준 은인들이다.

-> 심지어 외가까지 한 동네였다. 엄했던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외사촌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동네 한 가운데 있었던 우리 집은 동네 아이들이 몰려드는 사랑방이었다. 모두가 내게 풍요의 한 자락을 나눠준 은인들이다.

 

* ‘풍요의 한 자락이라는 표현이 참 좋아요.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 싸여서 살다보니 사건도 많고 추억도 많고 감정도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그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삶이 풍요로워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에피소드까지 있다면 정말 풍요로운 글이 되겠네요.

 

<매디>

-기억할 수 없는 시절에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아늑함은 할머니의 따뜻함과 유사했다.

->기억할 수 없는 시절에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공간이 주는 편안함은 할머니 품의 따뜻함과 유사했다. 몸을 뉘이면 아늑했던 것이다.

 

-나 역시도 그 곳이 애틋하다. 나이가 들면서 친척언니들은 더럽다고 불평을 하곤 했지만, 나에게는 괜한 트집으로만 들렸다. 사실 더러워도 상관없었던 것 같다. 익숙해진 공간만이 주는 공기가 있었기 때문일까. 떠나보내기 아쉬운 공간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 문장과 묘사가 안정적이네요. 감정의 넘침 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가서 편안히 읽혀요. 거실의 가운뎃 방, 강강수월래 하던 옥상, 태어난 집 자체에 대한 편안함 등의 사례를 통해 익숙한 공간이 잘 표현되었어요. 마지막 문단 떠나보내기 아쉬운 공간에 대한 마무리도 좋습니다. 민형이 평소 빨리 버리고 쉽게 싫증내는 것(이 있다면)과 할머니댁 이야기가 대조되면 떠나보내기 아쉬움이 더 잘 전달되겠죠. 이 글을 통해 사물과 관계 맺는 법을 사유해볼 수 있도록요.

 

<정푸른>

-나는 네가 그저 철없는 청춘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는 몸부림 쳤던 것 같다. 포기되지 않으려고. 너를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사람들을 향해 너의 방식으로 네가 거기 있음을 소리쳤던 것이다.

 

-우리가 만나지 않은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그 동안 너는 계속해서 변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두렵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네가 두려운 것 보다, 달라진 너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예전과 다르게 너를 대할 것 같은 내가 두렵다.

 

* 위의 문장 좋아요.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결핍, 평범하지 못한 시간을 보낸 이모, 사촌동생이 빈 부분을 푸른씨에게 어떻게 채우고자 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와 예시가 부족하네요. 구체적인 살을 조금이라도 붙여주세요. 적어도 나를 경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한다는 말, 인간은 서로에게 기대고 영향 받으며 살 수밖에 없음이 핵심 주제로 표현되도록요.

 

<별집사>

-친구 미희의 문자에 순간 망설였다. ‘예배 후에 생각해보자.’ 이런 마음을 앞질러서 어느새 내 손가락은 문자를 보내고 있다. “몇 호지?” 하고 말이다.

->친구 미희의 문자에 순간 망설였다. ‘예배 후에 생각해보자.’ 이런 마음을 앞질러서 어느새 손가락은 문자를 보내고 있다. “몇 호지?”

 

* “몇 호지?”로 끝나면 글이 더 긴장감 돋습니다. 자분자분 자상하게 이야기 하듯 들려주는 별집사님 문체도 좋은데 가끔은 단문을 써서 글에 리듬과 활력을 주세요.

 

-인도 여행에서 유쾌한 인도인들을 보고 그동안 어깨에 지고 살던 삶의 긴장을 조금은 풀어냈다는 거

 

*이 부분이 궁금하네요. 글에서 내 것부터 챙기지 못하는 나에 대한 비중을 좀 줄이고 달라진 나의 변화를 기록해주세요. 과제 키워드가 유년이긴 하지만 유년의 습성이 나에게 미친 변화를 짚어준다면 글이 더 의미 있겠죠. 이를 테면, 세상은 주인공의 이야기만 범람하고 또 원하는데, 누군가 관객으로 사는 즐거움, 의미, 덕목을 이야기해준다면 좋을 거 같아요.

 

<구카>

-어차피 기억이라는 것은 현재 나의 상황에 맞춰 짜여 있을 엉성한 천조각이자, 제 멋대로 그려진 감수성 어린 무용담에 더 가깝지 않나 싶어요.

-사실은, 굉장히 옹졸하고, 융통성 없고, 소심하기 그지없는 사건들만 드문드문 떠오릅니다. 대부분 잊고 싶은 일들뿐이고 실제로도 많은 부분을 잊어버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들, 어리석음과 자기 방어 대신, 우아한 타협을 할 수 있을까요? 책에서는 모두들 세상과 화해하고 깨닫고 자신을 파헤치고 다시 조립하고 한권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노래들이 태어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유년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기분을 떨칠 수 없습니다.

 

* 위의 문장 좋고요. 대체로 얽힘 없이 잘 읽혀요. 잔물결이 이는데, 아래 파도를 숨기고 있는 잔잔한 바다 같아요. ‘잊고 싶은 과거의 일들에 대한 정보 제공 없이 감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니까 깊은 공감은 어렵습니다. 섬에서 강남 8학군으로의 극적인 환경 변화가 한 아이의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조용한 증오를 품는 아이의 내면이 궁금합니다. 아울러 아직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어른 아이, 라고 왜 자신을 규정하는지 더 파고들어주세요.

 

<베로>

-나의 유년시절은 체계 없이 깎이거나 눈치 없이 또 자라나는 잡풀 같았다. 그래도 제초제를 뿌려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사람은 없었던지 듬성듬성 자라난 잡풀은 지금도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다. 말이 좋아 자연상태 그대로, 무농약 유기농이다. 철들지 않는다는 말이 계절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 같다. 죽음을 모르고 푹푹 자라 열매 맺는 가을도 잎을 떨구고 죽을 겨울도 오지 않는. 누군가 죽어가는 줄 모르는 내내 뜨거운 여름. 그러다가 푹 꺾일라.

 

* 잡풀의 비유는 매우 적절합니다. 오지랖 넓음, 눈치 없음, 마음 다함의 일화들이 퍼즐처럼 맞춰져서 따뜻하고 오싹하고 애잔한 베로님의 유년을 보여주네요. 그 잡풀이 지금도 불쑥 튀어나와서 어떤 일을 겪는지 궁금합니다. 유년의 경험이 나를 내내 뜨거운 여름으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만, 좀 모호하고요. 위 단락에서 베로님에 대한 규정이 모순됩니다. ‘자연상태 그대로자연을 거스름(계절의 변화 없음)’

 

베로님을 그토록 애지중지 자상하던 아빠가 부부싸움이나 언니에게 폭력적인 태도를 보일 때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생각들, 한 시간 넘은 피터팬의 맹세 - 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는지도 이유 등을 간추려 넣어준다면 어떨까요. 아빠에 대한 복잡한 마음은 베개 밑에 숨겨둔 칼처럼 하얀 천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네요. 하나하나 에피소드는 매우 생생하고 위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논리적 필연성을 가져야 글이 힘을 얻습니다.

 

<율마>

-사르트르와는 반대로 애초에 연극 무대에서 성실한 배우가 되지 못했던 나는,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였다. 무대에서 버림받은 것인지 스스로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지점에서 대사도 지문도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에 자주 맴돌던 한 마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였다.

-나는 아직도 실 가닥을 하나 더 늘어놓고, 방황하듯 힘들어하고 여행하듯 즐기고 있다. 연극이 아닌, 정해진 역할이 아닌, 진짜 ''로서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떻게 고속도로처럼 쭉 벋은 길일 수 있겠어. 라고 나를 다독여도 본다. 이제는 역할놀이도 사회생활도 적당한 연기로 대처할 수 있는 나이지만 사실. 고백하자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어린 나로 언제나 세상을 낯설고 어색하게 바라보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차분하게 써내려간 조숙한 소녀의 일기를 보는 느낌입니다. 운명, 연극, 실태래 등 익숙한 생에 대한 비유로 유년과 현재를 서술했는데 예화와 배경 설명이 부족합니다. 독자가 소외됩니다. 유년에 내가 행한 것, 본 것, 느낀 것의 줄거리가 충실하면 읽는 사람은 생각할 것입니다. ‘, 율마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구나혹은 어른이 된 지금은 역할놀이를 적당한 연기로 대처하는구나.’ 이렇게 판단할 근거를 제공해주세요. 모호한 문장은 구체적으로 다듬어주시고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도 논리적 징검다리를 촘촘히 놓아주세요. 율마님에게 내장된 나긋나긋 아름다운 리듬이 춤추도록.

 

<이슷트>

-그들은 손수 폭력의 생산자가 되기도 하고 폭력을 배양하기도 했지만, 너무 자랐다 싶으면 무자비한 폭력으로 잘 키운 폭력을 짓밟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정작 참지 못하는 것은 어중간함이었다.

-우리는 우둔한 소들처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일렬로 줄을 맞춰 섰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어중간함을 벌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겪는 폭력의 순간에는 나같은 어중간한 것들과는 다른 고귀한 점이 있었다. 굵고 짧게. 그들에게는 모멸감이 없었다. 짐짓 비장하기 까지 했으며 상처는 곧바로 영광이 되었다.

-2학년 때 기분 나쁘다고 우리 반 창문을 주먹으로 깨고 피를 흘리며 유유히 떠나도 아무 야단도 맞지 않은 부자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친해질 수 있는 내 앞자리에 앉아 바닥에 가래 침을 뱉고 있었다.

-내가 열여섯 이었을 때 내 마음에 그녀의 동상을 세웠다. 스무 살 때는 따뜻한 시선과 손길로 손수 그녀의 동상을 끌어내려 내가 성공할 때까지 그녀를 수렁 속에 처박아두기로 했었다. 서른한 살이 되어서는 그녀의 동상을 동정의 늪에서 건져내어 수치로 인식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를 글감으로 삼아 내 멋대로 여기 놓았다 저기 놓았다 해본다.

-졸업 앨범에 그녀의 칸이 생략 된 이후로, 부자는 수많은 생략을 거듭해왔을 것이다. ‘벼룩 시장이나 교차로같은 구인 신문을 뒤적이다가도 초 대졸 이상, 고졸 이상 항목을 마주할 때마다 수많은 빗금을 쳤을 것이다. 경상북도 대구시 칠성동 허름한 상가 아파트에서 태어나 제일 여중을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탈학교한 말썽꾸러기 소녀 이부자는 자라서 세계의 그림자 진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부자는 추억 속에 잊힌 것이 아니라 부자는 격리되었다.

 

* 사유 돋는 문장들 추렸음. 이부자라는 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생의 이면과 세계의 후면을 두루 보여주네요. 개인의 서사가 보편으로 확장된 매우 재밌고 가치 있는 단편 소설입니다. 웃기고 슬퍼요. 거침없고 섬세해요. 감정의 미세한 겹을 보여주고 사계절의 흐름처럼 변화무쌍하니 한달음에 읽게 됩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비약적으로 발전. 세공술의 힘! 그럼에도 아직 실밥이 덜 뜯긴 곳이 있네요. 문장이 끝나면 마침표 꼭 찍어주고. 벼룩시장, 교차로 같은 매체명은 작은따옴표로 처리해주세요. 떡뽁이-> 떡볶이, 잊혀진->잊힌

 

<신홍엽>

-줄곧 서울에서 살다 초등 5학년 전남 무안으로 이사를 가니 삶이 노래고 노래가 삶인 모습을 자주 목도 하였다. 양파 작업하며 마늘 작업하며 진도 아리랑을 부른다. 또 마을에 잔치가 있으면 소리꾼들이 와서 하루 종일 소리를 한다.

-이제 이선희의 노래가 아닌 구불구불하고 애절하고 낭창낭창한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7살 아이를 따라 무안군립국악원을 갔고, 그렇게 나는 소리를 시작했다.

-나는 그림책을 읽고, 동화책을 읽는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다. 살아있는 노랫말을. 오선보에서 놀기보다는 아이들과 책을 읽고 떠들썩하게 쏟아낼 수 있는 그런 노랫말. 북치고 장구치면 신명나듯, ()도 읽고 장구도 치며 떠들썩하게 한판 놀아보고 싶다.

 

* 짧은 글이지만 아주 생생합니다. 한 아이가 끌리듯이 소리에 매료되는 상황이 그려져요. 구불구불 낭창낭창은 탁월한 묘사네요. 17년의 득음과정 이후 12년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묘사해주세요. 그러면 판소리-동화책-글쓰기로 삶이 흘러가는 과정이 더 드라마틱하고 떠들썩하게 와 닿을 것 같습니다.

 

<말러>

-비밀스런 다락방이 있었다. 작은 몸짓의 아이가 겨우 앉을 수 있은 낮은 다락방에는 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바닥으로 턱을 괴고 엎드리면 정확히 창의 정중앙을 통해 집 앞의 앞동산까지 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다. 오래된 책 냄새가 그득했고, 그곳에 누워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으며 마른 풀더미로 만들어진 폭신한 침대를 상상하곤 했다.

 

-별명이 무색하게도 울보이자 순둥이는 가장 사건사고가 많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연탄가스를 가장 심하게 맡아 의식을 잃기도 했고, 개천가를 가로지르는 어른키만한 높이의 다리위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화장실(푸세식)에 빠지기도 했다니, 나로서는 믿기 힘든 사실이다.

 

* 서러운 때, 식겁한 때, 행복한 때 등 일화가 아기자기합니다. 정황 묘사가 친절하여 잔잔한 미소를 띠고 읽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정의하는 인생의 전성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전성기라고 말할 만한 판단 근거들이 없어요. 나는 무엇을 인생의 행복이라고 여기는지, 정리하는 것은 필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탈한 유년 시절 이후 내리막길 이라는 한 줄 설명에도 더 깊이 들어가서 살을 붙여주세요.

 

<벌꿀>

-그 골목엔 해가 찾아오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모래가 많이 섞인 울퉁불퉁한 시멘트 블록 길은 산 속 계곡도 아닌데 녹색 이끼로 뒤덮인 채 홀로 자기 몸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그 골목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목을 낮추고 등을 구부리고 몸통을 가재미처럼 납작하게 만들어야 했다.

-ss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길거리로 문이 나 있는 골목. 그 애 집 앞을 지나가게 될 때마다 나는 떠 올렸다. 커다랗고 시커먼 남자한테 혁대로 맞고 있는 그 애. 험하게 발가벗겨져 오들오들 떨고 있는 비쩍 마른 그 애. 고무줄이 한껏 늘어난, 누렇게 변색된 면 팬티 한 장을 걸친 그 애. 몸 여기저기에 붉은 상처가 난 그 애. 한번 시작된 상상은 장마철 명아주처럼 쑥쑥 자라났다.

-지루하도록 성실한 내 집. 같은 봉천동 하늘 아래에서 내가 사는 집 안의 공기는 대체로 평온했다. 혁대를 드는 일 없는, 아침마다 반듯하게 다려진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공무원인 저 남자가 나의 아빠라는 사실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상황 묘사의 대가. 벌꿀님 글을 읽고 있으면 어떤 고유의 분위기가 엄습해요. 소리로 압도하는 히치콕 영화처럼, 에코우가 내장된 글이랄까. 낮고 음울하고 가끔 환해지는. 해의 쨍쨍함이 아니라 달의 은은함으로 밝아져요. 이 글도 그러네요. 마지막 대관령이 좋아는 반전입니다. 가정폭력을 간접 목도한 아이의 불안, 공포가 드러나고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는 아이의 안간힘이 느껴져요. 공무원 아빠가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는 문장은 글의 전체적인 톤(어조)에서 튑니다. 같은 봉천동 하늘을 이고 있지만 지루하도록 성실한 내 집에 대한 얘기가 슬쩍 나온다면 서사와 묘사가 자연스럽게 균형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은재>

-나는 방 안의 책보다는 그 방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그래야 엄마와 아빠의 칭찬을 담뿍 받을 수 있었고, 집에 놀러온 누군가의 부러운 시선이 한 번 훑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엄마의 기분이 좋아졌으며, 또래 친구들과 나는 확실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우리집 자그마한 TV를 책들이 가려주었고, 집이 좁아터지기 직전인 건 작은 평수 때문이 아니라 책 때문인 것처럼 보였으므로.

-언젠가 엄마 손을 잡고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 구경을 갔다. 책으로 가득한 그 넓은 공간에 나는 완전히 압도되어버렸다. 지금도 종종 그 서점에 가면 서점 주인과 결혼하고 싶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궁금해진다. 나는 책을 읽고 싶은 건지, 책을 갖고 싶은 것인지.

-나에게 작은 도서관의 책들은 그 자체가 위장이고 연극 무대였던 걸까. 나는 문학병이 아니라 그저 남다르고 싶은, 특별하고 싶은 병에 걸렸던 건지도 모른다. 변명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온다. “진실한 몰입과 연기 사이의 아물아물하고 흔들흔들한 경계선을 어떻게 분명히 그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말이다.”

 

* 내 방은 작은 도서관. 문청 아빠와 작가를 꿈꾼 엄마 사이에 태어난 아이. 책에 둘러 싸여 살았지만 그것이 누구도 문학병에 걸리게 하지 못하고 각자의 욕망 해소 및 과시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 연극놀이로 치러진 책과의 성장담이 그려졌네요. 몇 살 때인지, 초딩인지 중딩인지가 없고 글이 전체적으로 모호해요. 유년시절 어설픈 책과의 연극이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더 적극적인 해석이 내려져야합니다. 활자 중독, 책에 대한 소유욕이 그래도 생의 위기국면에 버티는 힘이 되어주었다던가, 여전히 어정쩡한 태도를 갖게 한다던가 등등 구체적인 일화를 넣어서 글을 입체적으로 만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