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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강사 인터뷰 - '자본의 멈춤을 도모하며 ㅋ'

* 글쓰기의 최전선 7기 수업을 앞두고 강사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어는 6기에서 '울분을 글쓰기로 승화'시켜 주목과 갈채를 받고 7기 반장으로 스카웃된 '이슷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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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은 해놓고 잘할 수 있을까? 하며 (초큼) 쫄아 있을 수강 신청자들과 

수유너머R 강좌 게시판의 조회수만 높이고 신청을 망설이고 있는 당신을 위해

글쓰기의 최전선 강좌에 대해 궁금한 점 몇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이것은 큰 모험임을 여러분 중 누군가는 부디 알아 주길 바란다.

내 글쓰기를 지도해 줄 사람, 그것도 위클리 수유너머 (수유너머에서 발간하는 웹진)에 

몇 년 간 인터뷰 코너 <전선 인터뷰>를 꾸려왔던 인터뷰의 달인을 인터뷰해야 하는 일. 

이것은 과제 아닌 과제다. 꺅


2013년 7월 마지막 주 토요일, 해방촌 수유너머 R 에 가니 시 세미나가 한창이다.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 시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는 은유쌤을 일단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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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ㄷㄷ 꺅 ㅜㅜ .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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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로 선정한 책들은 모두 읽은 책들인가?

 

= (발끈) 그렇다.

 

교재 선정은 어떤 기준으로 정했나?

 

= 매 수업마다 교재로 새롭게 하려고 한다. 내가 게을러질까봐 ^^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태도랄까.

교재선정 기준은 좋은 문장은 기본이고, 문제의식과 관점이 탁월한 책들이다.

 

혼자 읽기 약간 난해해서 여럿이 같이 읽으면 더 좋겠다 싶은 책도 있고 -사르트르 <>,

이야기를 끌고 가는 능력과 작가 고유의 개성 있는 문체를 배울 수 있는 책도 있다 -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

<밤이 선생이다>는 담백한 문제 깊은 사유로 이뤄진 단문 수필로, 매주 짧은 글 한편을 과제로 제출하는 우리 글쓰기 수업에 적합한 교본이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자신을 둘러싼 도시환경을 감각하고 해석하는 감수성을 배울 수 있다.

 

 

낮 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주부나 학생, 프리랜서 같은 이들이 수업에 많이 온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는 우리에게 최전선, 최전선의 글이 있을까?

 

= 삶을 사는 사람들, 다 최전선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여차 자칫하면 일자리를 뺏기면 그게 최전선 아닌가?

나만 해도 당장 하는 일 멈추면 밥을 굶는다. 맥도날드 카운터 앞만 삶의 최전선이 아니다.

 

 

 

수유너머 외에도 다른 곳에서 기자 입문, 소설가 입문 등 글쓰기 수업이 있

이 수업들과 글쓰기 최전선의 차이점은?

 

= 공부는 나를 찾아가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지러운 자본의 흐름 사이에서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한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 능력을 언어로 잘 풀어 낼 수 있음을 뜻한다. 나는 언제 슬프고 기쁜지,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째서 그게 싫고 좋은 지를, 자기 언어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근데 이게 쉽지 않다.

 

글쓰기 최전선에서는 말과 글이 자유롭게 교환 되는 장이 마련된다.

그 안에서 매주 서너 시간 듣고 말하다 보면 그간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된다.

타인의 말과 글이 나의 생각에 덧입혀 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신체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이 기자과정, 소설가 입문 과정 등 표준화된 목적과 계산에 부합하는 글쓰기 수업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배움의 장치와 영감의 요소는 있다. 나는 왜 기자나 소설가가 되려고 하는지,

작가는 세상을 향해 짖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뭘 얘기하고 싶은지,

어떤 절실함과 문제의식이 있는지, 질문하고 말을 던져보는 시간이다.

 

12주 수업 듣고 나서 직능인으로서 '교환가치'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존재가치'를 탐색하는 기회는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자기기록을 하다보면 속에서 삭히고 삭힌 오래된 기억 대부분은 치욕, 치부와 관계된 것,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할 경험을 글로 쓰게 될 때가 많다. 나는 큰 맘 먹고 드러냈는데 남들에 의해 쉽게 이야기 되는 폭력적 상황을 경험 할 수 있다. 비판도 받는다, 그럴 때 후회가 들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쓰기 싫어지고...

 

= 그렇다. 비판의 의견이 나왔을 때 우선은 반발이 생긴다. 나는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왜 비판하지 싶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돌이키는 활동이 시작된다. 이 다글다글대는 세상, 앞만 보라고 하는 이 사회에서,

돌아보는 순간 도태되었다 말해지는 구조에서 돌아 볼 수 있는 순간은 굉장히 소중하다.

 

자기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경력도 다른 그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 이 길 하나 밖에 없다 생각해왔던 것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깨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서 좋아요라고 수강생 한 분이 후기를 남겼다. 그 말이 참 와 닿았다.

내가 살아온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알게 되는 순간, 이것이 우리 글쓰기에서 가져 갈 수 있는 최대의 선물 이라 생각 한다.

 

 

 

그렇담 글쓰기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해체한다 했을 때, 또 자신의 고유성을 가꾸는 일은 어떻게 되는가?

자신의 고유성도 글쓰기에서 중요한 부분 아닌가? 이 사이의 긴장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어떻게 조절 해야 하나

 

= 사실 자신의 고유성을 아무리 해체 하려고 해도 잘 안된다. 또 다 해체 되어버리면 어떻게 살겠나.

해체되었다가 공고해졌다가 반복하면서 균형을 잡는 일이 삶의 과정이다. 하나의 관성으로 흘러가는 삶이 가장 위험하다.

외곬수가 된다고 하지 않나.

 

강사나 저자의 이야기도 진리가 아닌 한 개의 의견이고 생각이다. 다른 이들의 이런 이야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가면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다.

 

 

자기기록의 수위조절은 가능한가? 어디까지 써야하나?

 

= 수위 조절 자체가 나를 드러내는 지표라 생각한다. 자기의 해결되지 못한 지점, 내가 무엇을 피해가고 있나,

열등감 피해 의식이든 뭐든 나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다. 어떤 일로 고통 받을 수록 세상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

'문학은 용기다'라는 말처럼 글 쓰고자 하는 사람은 용기가 좀 있어야 한다.

 

나를 타인에게 드러냈을 때 반응은 여러 가지다. 위로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폭력의 방식일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을 견뎌내는 것이 고통을 견뎌내는 일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이론이 있다.

상처를 마음에 품고서 그 안에서 곪고 질식당할 것이냐 아니면 드러내서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낼 것이냐.

이는 내가 내 삶을 장악할 수 있느냐. 남의 시선에 이끌린 채로 가느냐의 두 가지 길이 있다.

글쓰기를 하면서 나를 세상에 던지는 훈련을 하고 뱃심을 키울 수 있다.

 

 

 

요즘 힐링, 치유, 구원 이란 말이 지겹도록 들려서

글쓰기 최전선의 셀프 구원이란 말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 불행은 개인적이지만 불행의 원인은 구조적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대로, 고통의 구조적 이유와 형성된 경로를 알면 덜 아프기도 하다.

우리는 이유 없는 고통을 못 참는 거지, 고통을 못 참는 게 아니다. 고통을 견딜만한 고통으로 만드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자기 구원으로서의 글쓰기다. 나도 그렇게 슬쩍 벗어나기도 했다.

 

카프카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에서 오는 고통을 '변신'으로 승화시켰다.

사르트르는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나는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한다'고 했다.

전태일은 자기 삶의 고통을 글로 치열하게 써냈고 나중에는 글이 삶을 이끌어간다.

삶으로 글을 쓰지만, 글이 삶을 이끄는 이 전도가 일어나는 지점이 자기 구원이 아닐까.

 

 

글쓰기 수업 수강생들은 서로 잘 알지 못하고 삶을 공유하는 부분도 협소하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의 내밀한 부분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난감할 때도 있다.

개인의 불행이 담긴 내용에 글 짜임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내용이나 그의 생각에 섣불리 조언하기도 힘들다. 글쓰기 수업에선 어떤 태도로 남의 글쓰기에 다가가야 할까?

 

= 듣는 능력 - 쓰는 능력 - 사는 능력이 같은 것이다. 연동한다. 이건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훈련해야 하는 부분이다.

글에 큰 미덕이 없을 때, 다시 말해 잘 쓴 글이 아닐 때,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깊이 고민(생각)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어떤 얘기를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시간, 이런 시간이 멋진 글 한편으로 성과물 하나를 내는 것만큼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령 소설가가 작품을 낸다면 책이 나오기 까지 과정마다 대단한 섬세함이 필요하다.

이처럼 섬세한 창작의 작업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깊게 생각하는 능력이다. 깊이 생각하는 능력은 곧 잘 듣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듣는 능력이 훈련이 되면 자기 내부의 목소리까지 들린다 ~ -나의 목소리가 들려~

 

 

 

수업은 읽은 책을 함께 토론하고 학인 들이 서로 합평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이미 모두가 모두에게 선생님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은유 쌤의 역할은 무엇인가?

 

= 말하게 하는 것, 듣게 하는 것, 쓰게 하는 것. 전부다. 글을 쓸 때는 좋은 스승보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나도 친구가 되는 거다. 좋은 친구가 되어서 곁을 지키고, 사람들이 막 뻗쳐가는 이야기의 잡아주는 가닥을 잡는 일도 한다.

지금 이대로 행복한 사람은 글쓰기 수업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뭔가 삶의 막힌 부분을 뚫고 싶어서 온다.

 

글을 읽다 보면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지점들이, 억압하여 뭉뚱그려 표현된 부분들이 잘 보인다.

그것은 글쓴이 스스로도 안다.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여지고 있는 부분을 같이 보고, 용기를 내라고 독력하고 같이 고민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덧질문. 글쓰기 수업시간은 왜 낮인가? 이번에도 직딩의 한스런 댓글이 달렸다.

선생님은 '노동'이나 '현장'에 관심이 많지 않나. 이러면 노동의 현장에 있는 소외된 노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 이중소외 된다.

혹시 이 수업을 듣고자 사직서나 장기 휴가를 신청하게 해 자본의 멈춤을 도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오, 어떻게 알았나? 자본의 흐름을 멈추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ㅎㅎ  

7기까지 오면서 저녁 시간대에 수업을 2번 진행했다. 수업은 기본이 3~4시간을 훌쩍 넘기는데 직장인들이 많이 힘들어 했다.

저녁 시간은 피로하여 수업 밀도가 떨어지더라. 그래서 낮 시간대로 옮겼다.

직장인들을 위한 글쓰기 수업은  따로 기획 하고 있다.

 

(만국의 직딩들이여 ! 이제 한스런 댓글을 멈추고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있으시길 ㅎㅎ~)

 

현재까지 열한분이 신청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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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더 알고 싶은 분은 지난 강좌 소개 인터뷰를 참고하시구요. 

그래도 더 궁금한게 있으시면 댓글이나 전화로 문의 바랍니다. 

이러고도 _망설이고 있는 여러분!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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