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성인의 말씀이야 이롭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삶의 한 능선을 넘는 즈음, 마흔 목전에 접한 노자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무위사상을 펼친다. 행하지 않으면서 행하고 爲無爲, 무사의 마음으로 일하며 事無事, 무미의 마음으로 맛을 보라고 말한다 味無味.
자연이 그러하듯 ‘검박하게 순리대로’ 살라는 말일 게다. <왕필의 노자주>를 공부한 기념으로 (글써서 밥 벌어 먹는 사람으로서 심기일전 차원에서) 노자의 가르침을 ‘글 쓰는 태도’에도 적용해 보았다. 좋은 글은 좋은 삶에서 우러나온다. 그 순환구도를 생각하면 '잘 사는 법은 곧 잘 쓰는 법'이기도 하다. 무위를 행한 글쓰기. 쓰지 않으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낮은 곳까지 스며라
노자는 ‘세상에서 가장 최상의 선은 물로 형용할 수 있다 上善若水’고 말했다. 가장 높은 수준의 덕행도 물의 덕행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물은 만물을 윤택하게 해주는 본성을 지녔으면서도 만물과 전혀 이해를 다투지 않는다. 낮고 더러운 곳에 머문다. 글도 낮은 곳에 출발하여 낮은 곳까지 이르러야 한다. 모든 이의 마음에 스미는 좋은 글이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현실에서 시작해야 한다. 끓일 때마다 조금씩 맛이 달라지는 김치찌개의 비밀처럼 똑같은 일상에서 미묘한 변화를 느껴야 한다. 화초에 물을 주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세월의 굽은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 삶의 낮은 곳에서부터 지극한 정서와 보편타당한 가치를 이끌어 내야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란 시를 보자.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둘째, 골짜기를 흐르는 물과 같이 운율이 살아있어야 한다. 흔히 글맛이라고 한다.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우고, 이명박은 초중고와 싸운다.’ ‘조선일보 첨으로 참으로 고맙다(조중동의 DAUM 뉴스 공급중단 소식에 대해 어느 네티즌의 글)’ 에서와 같이 리듬이 있어야 읽은 이의 마음에 착착 감긴다.
셋째, 예리함과 원만함이 적절히 살아 있어야 한다. 예리한 논리는 거센 흐름을 이뤄 바위처럼 단단한 악의 논리를 뚫을 수 있다. 따뜻한 감성은 물처럼 감싸 안아 세인들의 모난 마음을 어루만져 둥글게 만들 수도 있다. 송곳도 되었다가 햇살도 되는 것이 글(물)의 힘이다.
넷째, 영혼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 물은 여름에는 흩어지고 겨울에는 응축되는데 때에 맞추어 움직이며 때를 놓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물이 자연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듯 글도 ‘나’라는 우주의 순리에 따라야 한다. 조건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쥐어짜듯 쓰지 않아야 한다. 안에서 무르익으면 자연스레 솟아 넘칠 것이다.
꾸미지 말라
다섯째, 진실한 말은 소박하고 꾸미지 않으며 信言不美 아름답게 꾸민 말은 진실하지 않다美言不信. 진솔하게 써라. 이는 상덕부덕, 시이유덕과도 일맥상통한다. 상등의 덕망을 지닌 사람은 형식적인 덕을 추구하지 않으니 上德不德, 이것이 진정으로 덕을 갖춘 것이다 是以有德 진정한 덕(글)은 꾸미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발로다. 청정무위의 경지다. 그것은 기질이다. 도에 정통한 다음에 우러나오는 기질이다. “뱃속에 시서의 지식이 가득하면 겉모습은 저절로 화려해진다.”는 소동파의 언급처럼 진정한 덕(글)은 교묘하게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내용을 지닌다. 진정한 풍류는 진실한 내면에서 나오는 이치다.
여섯째, 겸손하고 솔직해야 한다. 스스로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知不知上, 명백히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은 병이다 不知知病. ‘지부지상 부지지병’은 글 쓸 때 특히 유념해야 한다. 내가 숙지하지 못한 사실로 남을 설득할 수 없다. 물이 삶에 녹아들어 피가 되어야 한다. 어설프게 섭취한 지식은 목에 걸린 떡과 같다. 그것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서 잘게 부서져야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오직 피로 써야 한다. 그래야 진리의 헌혈이 가능하다. 겉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써야 한다.정직하고 솔직하면서도 방자하지 않고 直而不肆, 빛나면서도 눈부시지 않은 光而不燿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직이불사 광이불요’의 경지다.
매일 써라
일곱째, 매일 써라. 물은 쉬지 않는다. 물은 늘 있다. 물은 멈추고 생각했다가 흐르지 않는다. 그저 흐르면서 존재한다. 물처럼 흐르고 흘러라. 구층지대 기어루토라 했다. 아홉층 높은 누대로 한 무더기 진흙에서 시작되고 九層之臺,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다 起於累土. 한 가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써라. 엉덩이가 배기고 눈이 빨개질 때까지 백지의 공포를 견뎌라. 글을 잘 써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다보면 잘 쓰게 되는 것이다.
‘손을 계속 움직여라.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어라.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그저 살아라
노자의 무위사상대로라면, 글쓰기도 없는데 글 쓰는 태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도상무명. 도는 영원한 것이지만 아무런 이름도 갖지 않는다 道常無名 했으니, ‘덕행의 글쓰기’란 표제가 부질없게 느껴진다.
글쓰기는 이름을 갖지 않는다. 글은 쓰려고 덤비면 써지지 않는다. 릴케는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쓰지 않고는 죽어도 못 배길 속마음의 요구가 우러날 때’ 글을 쓰라고 조언했다. 그러한 요구는 어떻게 생겨날까. 글쓰기는 인생 전체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냥 살아야 한다. 그저 살아야 한다. 살아야 쓸 것이 있다. 살지 않으면 쓸 것도 없다.
생 안으로 한 걸음 내딛어야 그것이 모여 길(道)이 된다. 글은 마음의 길을 따라 난 발자국이다. 그러니 걷고 또 걸어라. 시장통의 파리처럼 사람에게 엉켜 붙어라. 그것이 글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라. 시인은 만물이 친구다. 자연과 연대하라. 그래야 몸이 열리고, 몸이 말을 할 것이다. 천지상합 이강감로, 천지의 음양이 화합하면 天地相合 만물을 적셔주는 단비가 절로 내릴 것이다 以降甘露.
그리고 그 지혜의 샘물을 아낌없이 퍼내라. 글 써서 남 줘라. 나누어라. 진실의 씨앗을 뿌려라. 그렇게 비워내야 또 다른 꽃씨도 날아와 뿌리내리고 싹을 틔운다. 날로 비워내는 것이 날로 채우는 것이다. 쌓아둔 모든 것을 남에게 주지만 자신은 도리어 넉넉해진다. 旣以與人己愈多. 명심하자. 기이여인기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