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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맑스

노동이 교환가치이길 중단하려면

 

"임금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재생산도 포함한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의 이 표본이 죽으면, 다른 표본이 그를 대체한다. 50명의 노동자가 죽으면,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다른 50명이 나타난다." (정경비요1권 -368)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 한 구절을 같다. 뻔한 얘기.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인데 '나타난다'라는 동사가 낯선감성을 일으킨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걸까. 무한증식 무한복제 가능한 존재로 산다는 것의 쓸쓸함.  한 존재가 쉽게 다른 존재로 대체된다는 게 자본주의적인 폭력구조를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쌍차 분향소의 22개 영정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22명의 죽음은 22명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되어 자동차는 차질없이 생산된다. 엠비시는 파업 130일을 넘겼는데도 방송은 그런대로 멀쩡히 진행되고. 재능노조는 61일로 농성1625일이라고 했다. 이제 투쟁사업장에서 천일은 기본. 쌍차걷기대회에서 단식농성 20일 넘긴 언론노조 위원장이 그랬다. 엠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제 시작이라고.

 

맑스가 말하는 착취는 노동자가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는 부등가교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환가치 자체의 착취 구조를 문제삼는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게끔 되어있는 구조. 자본주의에서 생겨난 이 교환가치 시스템이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자가증식 운동이다.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능력을 사용해야 생기므로, 노동은 잉여가치의 원천이 된다. 생산수단이 박탈된 자유로운 개인(굶어죽을 자유를 가진 개인)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팔고 자본에 피땀을 흡빨리면서 임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구글도 예외없다. 자본의 질서에 들어갈 때만, 자본의 이익에 복무할 때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아가 자아실현의 꿈을 펼칠 수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게 맑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물음. 자본의 외부는 어떻게 창출하는가.  

   

공장이나 자본을 매개하지 않고서 바깥 세상과 관계 맺고 자아실현을 경험할 수는 없을까.

노동이 (교환)가치이길 중단하고, 노동이 자기단련이 되는 길은 없을까.

일할수록 피폐해지지 않고 일할수록 자아확장이 일어나는 그런 노동을 맑스는 단련이라고 불렀다.  

 

맑스의 또 한 가지 문제제기.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원자재는 썪는다. 기계는 먼지가 쌓인다. 공장은 폐가가 된다. 가령 집에서 엄마가 일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시들고 냉장고 야채도 썪고 집안이 난장판이 되는 것과 같다. 고로, "노동은 죽은 것을 살려내는 불이다." 그런데 정작 그 불의 담지자인 노동자는 복락을 누리지 못하고, 자본가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고 보물을 얻는다는 게 맑스의 지적이다. 노동자가 노동을 발휘해서 물건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손길이 닿지 하지 않았으면 쓰레기가 됐을 그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그에 따른 대가는 지불받지 못한다는 거다. 꿩먹고 알먹는 자본가. 노동자는 이중삼중 보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이중삼중 착취를 당한다. 맑스 읽으면 심란하다. 한 인간이 피조물 상태에서 세계내존재로 던져져서 삶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고달픈 곡예가 되어야하는 걸까. 왜 노동자는 평생 일하고도 가난하고 고달픈가. 이 부조리한 세상은 왜 이렇게 잘도 돌아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