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이는 사람의 나라

[사람사는세상]

‘기억할만한 지나침’이라는 기형도 시가 있습니다. 눈이 퍼붓는 날, 관공서 건물을 지나다가 춥고 큰 방에서 어느 서기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입니다. 읽고 나면 찡합니다. 우는 남자 때문이 아닙니다. ‘보는 사람’ 때문입니다. 다 자란 남자가 우는 일보다 더 놀라운 건, 우는 사람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다 큰 남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겐 그랬습니다. 유리창 너머 낯선 자의 눈물에 발목 잡힌 한 사내의 시선이 비명처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시는 마지막 행에서 ‘나는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끝나는데, 건물 밖에서 펑펑 내리는 눈 맞고 눈사람이 되어버렸을 하얀 남자의 뒷등이 두고두고 아른거렸습니다.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해주었다는 의미에서 가장 정치적인 기형도의 시로 기억합니다.


그 사내가 환생한 것일까요. 한진중공업 투쟁 사진집 <CT85-사람을 보라>에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건물 옥상에 서 있는 까만 남자입니다. 아마도 크레인 위에 매달린 한 사람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각 잡힌 뒤태가 르네 마그리뜨 그림의 신사처럼 비현실적입니다. 일하다가 지나는 길에 들렸을지, 위태로운 운명을 마주하기 위해 잠시나마 그도 위태로운 자리에 섰나봅니다.

그 옆 사진에는 빨간 양동이를 든 꽃무늬 바지 차림의 중년 아주머니가 옥상 너머 ‘사람’을 바라봅니다. 난간에 딱 붙어 있는 모습이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을 듯싶습니다. 35m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은 자기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듭니다. 사람과 사람사이, 시선이 머물고 마음이 기울고 운명이 얽힙니다. 기형도가 그랬듯이 그들은 저마다 속으로 말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체험의 궁극에서 시적체험을 합니다. <CT85-사람을 보라>는 시집 같은 사진집입니다. 미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의 고귀함, 그리고 희망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절망의 정의로움을 사진-언어로 보여줍니다. 온통 상품 이미지로 도배된 스펙터클 사회에서 문화 장치에 빼앗겼던 ‘시선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사진들입니다.

책으로만 보기가 아까워 삼선동 별꼴카페에 전시회를 마련했습니다. 고맙게도 사진가들이 흔쾌히 응해주었습니다. 소금꽃나무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 만에 땅에 발 딛는 ‘작은 승리’의 순간까지 아슬아슬하게 담았습니다. 남들은 무심코 스쳐가는 삶의 자리를 찍는 별난 외눈박이 사람들, 한진중공업을 기록한 사진가 23인의 기억할만한 지나침. 밖에서는 안 보이는 사람의 나라에 초대합니다.


* 사진: 노순택
* 위클리수유너머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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