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상처

[차오르는말들]

모처럼 믹스커피가 먹고 싶어 커피물을 끓였다. 2분여 흘렀을까. 보글보글 물이 익어가는 소리 요란했다. 무선주전자 뒤편의 믹스봉지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벌레를 포획하는 새처럼 날렵하게 믹스스틱 하나 빼오려는 찰나, 눈보라처럼 회오리치던 뽀얀 김이 손목을 감쌌다. 1초 정도. 아아아. 칼바람 속을 지날 때 "추워 추워" 란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처럼. 아파. 아파. 말이 샜다. 손목을 심장 앞으로 얼른 뺏어왔을 때는 이미 피부가 벌겋게 익은 이후다. 찬물로 씻고 얼음찜질을 했다. 손목에 가스렌지가 내장된 기분. 시간이 흐를수록 살이 가열됐다. 후끈후끈. 약국에 가서 화상 연고를 사서 바르고 진정되길 기다렸다. 웬걸. 반나절이 지나자 상처부위가 검지손가락만한 투명에벌레 모양으로 부풀어 올랐다. 달걀이 비둘기로 변하는 마술. 징그럽다. 눈 뜨고 볼 수  없어 두 눈 감고 봤다. 욱신욱신 통증이 번졌다. 아무래도 피부과를 가야겠다고 마음 먹자 우울했다.

세상에서 제일 가기 싫은 곳이 은행과 병원이다. 거기에 있으면 그냥 초라해진다. 삶이 통째로 위탁되는 곳. 생존을 허락받기 위한 곳. 절차가 번거롭고 까다로운 곳. 나의 자율성이 상실되는 장소. 시키는대로 버튼을 누르고 서류를 내고 사인을 하고 그리고 받아오는 것은 숫자가 찍힌 종이 나부랭이. 그것이 내 삶을 쥐락펴락하는 화폐증서다. 병원은 생명증서를 발급한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검사하라면 하고 돈내라면 내고 시키는대로 일사천리로 행해야 한다. 삶에서 살이 고스란히 분리되는 그곳. 그 살의 선택권은 내게 없다. 한없는 기다림이 요청되는 그곳. 불쾌한 수동의 삶, 피하고만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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