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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46 빈 손 / 성기완





당신을 원하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떠돌이

가 돼 그것을 놓았는데 다른 무얼 원할까 그 무엇도

가지기가 싫은 나는 빈 손, 잊자 잊자 혀를 깨물며 눈

을 감고 돌아눕기를 밥먹듯, 벌집처럼 조밀하던 기억

의 격자는 끝내 허물어져 뜬구름, 이것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잊혀지고 말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은 해구

보다 더 깊어져 나는 내 빈 손을 바라보다 지문처럼

휘도는 소용돌이 따라 망각의 물로 더 깊이 잠수하

며 중얼거려 잊자 잊자

 

- 성기완 시집 <유리이야기> 문학과지성사

 



“요즘 뭐 하고 지내셨어요?” “방황하면서 지냈어요.” 말해놓고 나니 푸푹 한숨 같은 웃음이 터졌다. 2010년 마지막 날, 수녀님과 이별을 고하기 위해 마주했다. 지난 일 년 수녀님들이 만드는 책의 표지이야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맡았었다.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한 일이었고 2011년도 길 여행 계획까지 세워두었던 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길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원고를 보내면서 수녀님께 이실직고를 올렸다. 그만두고 싶다고. 모든 헤어짐은 서먹하다. 변명을 보탰다. “사실 원고 15매 쓰기는 저한텐 일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서요.” 말끝을 흐리자 수녀님은 동화책에 나오는 마더테레사 같은 너그러운 미소로 손을 줘보라 하셨다. 내 손 위에 손을 포개고는 그동안 애썼다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것도 많다고 잘 쉬라며 꽉 쥐어주셨다. 연주를 마친 악기처럼 은은히 온기가 번지는 빈손을 주머니에 끼워넣었고 돌아섰다. 헤어질 때 울지 않게 된 것을 스스로 대견히 여기며 중얼중얼, 영하의 바람을 가르는 혼잣말 떠돌이가 되어 한참을 걸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따뜻한 밥 한 끼 먹자던 선배에게 갔다. 빨간 냄비에선 청국장이, 일인용 갈색 뚝배기에선 계란찜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누가 차려주는 밥을 열심히 먹었다. 왜 뜨거운 국물은 목에 들어가면 말간 콧물 되어 나오는 걸까. “나 포함해서 사람들이 불쌍해. 인간이란 종에게 희망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힘들 게 싸우는 사람들 만나고 오면 힘이 났는데 우울해. 무기력해지고.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슴에 고인 검은 회한을 퍼내며 하얀 밥덩이를 우겨넣었다. 한참 후 빈 밥그릇에 냉수같이 싱거운 말이 들어찬다. “그럴 때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또 나아진다. 좀 쉬어라.”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와서 찬물로 했더니 고무장갑을 벗어도 손이 빨갰다. 동태처럼 뻣뻣한 손, 절절 끓는 아랫목에 녹였더니 흐물흐물 익어서 도로 빨개졌다. 오래 울어 퉁퉁 부은 눈처럼 부푼 발개진 나의 빈손, 헤어진 손. 삶을 원하지 않기로 한다. 잊자 잊자. 2011년은 계획없음. 목적없음. 화폐없음. 사랑없음. 외롭기로 작정한 빈손으로 2010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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