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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흰둥이 생각 /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

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

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

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

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

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

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애늙은이처럼 아기를 좋아했다. 내 나이 고작 7세 때 윗층에 사는 아기를 보러 새댁 아줌마 집을 계단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아기의 돌잔치가 열리는 날. 새댁 아줌마가 나를 부르러 왔다. 낯선 사람이 많아서 아기가 계속 운다고 사진을 찍어야하니까 와서 아기를 달래보라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외할머니가 안아도 울고 할아버지가 안으면 더 울던 아기가 딱 두 명의 품에서만 수도꼭지 잠근 것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새댁아줌마와 나.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알아보듯 신통방통하게도 아기는 체취와 체온으로 나를 알아차렸다. 그 신기한 장면을 본 친척들이 웅성거렸다. 어린 나는 으쓱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의 존재감을 인식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앨범에 사진 한 장 누워있다. 빵 끈 같이 누런 금반지를 낀 아기를 안고 있는 바가지머리의 여자아이. 품에서 내려놓고 싶지 않았던 나의 첫 강아지, 흰둥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내 방에서 아기가 자고 있었다. 이웃 중에 과외를 하는 새댁이 있었는데 수업할 때마다 우리엄마한테 아기를 맡긴 것이다. 나는 이불을 살며시 떠들어 보았다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엎드려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등짝이 유독 까맸다. 분유통 모델처럼 포동포동 젖살 오른 뽀얀 아기만 보다가 까무잡잡한 아기를 보니까 너무 신기했다. 아기는 다 예쁘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백옥 같은 아기는 눈부셔서 예뻤고 검정콩 같은 아이는 단단해서 사랑스러웠다. 엄마는 이웃집 아기를 돌보실 때면 항상 ‘강아지~’라고 부르셨는데 그 아기는 까맣다하여 검둥이강아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는 아기가 오는 요일엔 집에 일찍 들어가서 검둥개가 문드러지도록 안고 놀았다. 물고 빨고 뽀뽀를 해댔다. 그러면 그 검둥이 강아지는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촉촉한 눈웃음으로 반응했다. 

워낙 아기를 좋아하시던 엄마는 당신의 첫 손자를 벅찬 감격으로 맞이하셨다. 이틀이 멀다하고 손자를 보러 오셨다. 나한테는 틈만 나면 ‘니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은 아기를 낳은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잘 먹고 잘 자는 순둥이 손자에게는 ‘지 에미를 귀찮게 안 해서 더 예쁘다’고 칭찬하셨다. 엄마는 연신 씻기고 연신 거둬 먹였다. 손자에겐 수식어가 더 붙었다. “우리 찹쌀강아지~”라며 엉덩이를 두드렸다. 찹쌀이라 함은 쌀보다 더 영양지고 윤기 흐르는 귀한 곡식이다. 시난고난 어렵게 산 엄마의 성장배경을 고려할 때 그것은 최고의 찬사였다. 아기 때부터 잘 자고 잘 먹던 찹쌀강아지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항시 모자람 없는 수면으로 밀가루 뒤집어 쓴 것처럼 뿌연 피부색을 유지하던 흰둥이 이마에 발긋발긋 여드름 꽃이 피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나의 흰둥이가 문득 낯설다.

“엄마 찹쌀강아지 한번 안아 보자”며 겨우 꼬드겨서 무릎에 앉히면 몽실몽실 체온 덥히던 흰둥이는 간 데 없고 기다란 장작같이 뻣뻣하다. 일분 정도 앉아 있다가 “영어 단어 외울 게 많다”며 일어나는 청소년 흰둥이. 앎이 네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삶의 진액 빼먹으려는 개장수만 우글거리는 세상. 시절이 하 수상하니 쇠줄을 풀어주고 싶다. 어디로든 달아나라. 나의 흰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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