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무더위로 푹푹 찌던 5월 마지막 일요일. 꽃수레랑 둘이 집을 나섰다. 동네서점에 찾는 책이 없어서 영등포교보에 가는 길이다. 버스는 냉동차처럼 시원했다. 모녀뿐인 텅 빈 버스에 아가씨 두 명이 탔다. 우리 앞쪽에 앉아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난 창밖을 보고 있는데 꽃수레가 말을 건다. “엄마, 저 부채 귀엽다!” 앞자리 아가씨들의 손에는 각각 팬시점에서 산 것으로 사료되는 노란 병아리 모양과 초록 개구리 모양 부채가 들려있었다. “어머, 저런 게 다 있구나. 정말 예쁘다.” 내가 봐도 깜찍해서 호들갑스럽게 맞장구쳤다. (아홉 살 생일날)
꾀쟁이 꽃수레
그리고 며칠 뒤, 밖에 있는데 전화가 왔다. 꽃수레다. ‘무슨 일이지?’ 요즘 꽃수레는 낮에는 전화를 통 안 했다. 엄마 일하는데 방해될까봐 그런다며 언제부턴가 뜸해졌다. 기특하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랑 내 친구한테 엄청 해댄 모양이다. 남편과 친구로부터 ‘꼭 바쁠 때만 전화 온다’는 민원이 접수됐다. 암튼 나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아보니, 배고파서 간식을 사먹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급식 먹고 오자마자 벌써 배고파? 그렇단다. 필요한 돈을 가져가라고 했다. 잠시 후 또 전화가 왔다. 새콤달콤을 사먹었다고.
“근데 엄마, 꽃수레한테 엄청 좋은 일 있어.” “뭔데?”
“길에서 부채를 나눠주지 뭐야. 그 때 봤던 그 병아리 부채다!” “진짜? 어머~ 웬일이니! 너무 잘 됐다!”
“응. 엄마 끊어~”
들뜬 목소리다. 원래 하굣길에 볼펜, 부채, 지우개, 파일 등 학원 판촉물을 자주 나눠준다. 여름이라 부채를 주나보다 했다. 집에 왔더니 식탁 위에 병아리부채가 놓여있다. 근데 부채에는 아무런 학원 이름이 새겨져있지 않았다. 옆에는 뜯긴 포장용 비닐이 나뒹굴었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꽃수레가 문방구에서 샀구나!’ 피식~ 웃음이 났다.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고 작은 머리를 굴려서 그런 꾀를 생각해냈을까’ 겨우내 이솝우화를 재밌게 보고난 뒤 <꾀쟁이 여우> <꾀쟁이 토끼>등 꾀쟁이 시리즈 책을 열심히 만들더니 동물친구들에게 ‘꾀 내는 법’을 배운 걸까.
아마 큰 애가 그랬으면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아이의 거짓말을 도덕성과 연결 짓고 확대해석해 미래를 걱정하며 엄중히 꾸짖었을지 모르겠다. 근데 꽃수레는 마냥 신기했다. 크는 과정이겠거니 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집념과 나름의 문제해결력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꽃수레의 소행을 모르는 척 지나쳤다가 잘 때 누워서 살살 꼬드겼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내 전화를 끊고 천삼백 원을 챙겨 대흥마트에 간다. 300원 내고 새콤달콤을 사고 옆에 문방구로 가서 1000원 짜리 부채를 산다. 집에 오는 길에 꾀를 낸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황급히 '증정용'이라고 둘러댄다.
단언컨대, 나는 딸에게 자비롭다. 사랑과 은혜가 큰 강과 바다와 같다. 여자아이 소품은 앙증맞은 게 많아서 지갑이 절로 열린다. 딸이 요구하기 전에 미리 사서 안기는 편이다.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다고 자신한다. 아빠는 완전 봉이다. 꽃수레의 '다이소'다. 뭐든지 그냥 척척 사준다.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고가품도 아니고 고작 병아리부채를. 꽃수레에게 물었더니, 전날 아빠랑 부채 사러 가기로 ‘꼭꼭’ 약속했는데 아빠가 늦게 오는 바람에 못 샀단다. 빨리 사고 싶었단다. “엄마한테 말하지 그랬어. 그럼 사줄 텐데...” 했더니 한다는 말이 “엄마는 맨날 바쁘잖아”
꼬뮤니스트 꽃수레
뜨끔했다. 미안했다. 근데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꽃수레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웃지 말라고 소리치다가 잠들었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한참 보았다. 세살 때부터, 집에 있다가 없다가 나그네처럼 떠도는 엄마에게 적응하느라 철이 다 들어버린 것 같았다. 목빼고 엄마 기다리느라 시계보는 법도 일찍 깨우쳤다. 일하는 엄마 밑에서 살 궁리 하느라 고생이 많다 싶었다. 꽃수레는 선생님, 이웃, 친구들에게 이구동성으로 ‘착하다’는 얘길 듣는데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 나 어릴 때랑 똑같다고 엄마가 말씀하시곤 했다. 어느정도는 동의한다. 근데 나의 유년시절엔 결핍도 몰랐고 욕망도 없었다. (미래의 엄마방. 책꽂이에 자주색 책은 니체전집이란다^^;)
(이층 침대와 선물이 있는 미래의 꽃수레 방) 한번은 꽃수레가 친구네 갔다가 그 집 엄마 따라서 2단지 다른 친구 집엘 놀러갔다. 집에 와서는 누구네 집은 넓더라, 침대커버가 예쁘더라고 설명한다. “응. 그랬니” 난 오른 귀로 듣고 왼 귀로 흘렸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 하는데 꽃수레가 옆에서 말을 건다. “엄마, 난 이 세상 모든 집이 크기도 똑같고 TV랑 냉장고 크기도 똑같았으면 좋겠어.” 헉....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평등 세상 꿈꾸는 아이의 코뮤니스트적인 발언에 너무 놀라서 흠칫했다. 똑같은 밥 먹여서 키웠는데 아들은 우리 집을 ‘살만하다’고 판단하고 딸은 ‘불편하다’고 규정한다. 그리곤 끊임없이 존재의 근거와 조건을 사유한다.
그 무렵부터다. 결핍을 창작의 동력으로 승화시켰는지 매일 그림만 그린다. 드레스 입은 공주도 꾀쟁이 시리즈도 아니다. 오직 집 그림이다. 자기 방, 마루, 엄마 공부방 등등을 그린다. 또 인터넷으로 집값 시세를 알아보는 아빠의 ‘어깨 너머’로 평면도를 몇 번 보고나더니 요즘엔 설계도면까지 그린다. 너무 큰 집은 '사치'이고 자기는 37평 정도면 만족하겠단다. 꿈도 소박한데. 지금이라도 경기도로 남하정책을 쓰면 불가능한 건 아닌데. 그걸 보고 있자면 '딸라이자'라도 내서 좋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
꽃수레의 삶을 지탱하는 욕망. 그것은 ‘결핍하는 욕망’이 아니라 ‘생산하는 욕망’이다. 하루하루 책상에는 설계도면이 쌓이고 있다. 꼼지락꼼지락 마음 내어 조금씩 소망에, 꿈에 다가간다. 부지런히 존재의 집을 짓는다. 철학하는 삶에서 설계하는 삶으로의 전환. 꽃수레의 명언노트는 설계노트로 업데이트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