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쟁이 꼬마 서넛이 팽이치기라도 할 것 같은 아련한 골목길이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내려온 오후 두시의 도톰한 햇살이 울퉁불퉁한 바닥에 고인다. 그 좁다란 길 위로 머리에 쟁반을 인 밥집 아줌마가 잰 걸음을 옮기며 단역배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종이를 실은 삼륜차와 오토바이가 곡예를 하듯이 서로 비껴간다. 양 옆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쇄소 미닫이 문틈으로 기계 굉음이 새어나온다. 허름한 골목길에 어시장 못지않은 활기가 넘친다.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비슷비슷한 골목길이 실개천처럼 이어지는 곳.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풍경이다.
영화의 고장답게 마치 거대한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충무로 일대에서는 각종 인쇄물만큼이나 다양한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생이라는 장편영화를 찍는 주연배우들. 봄의 전령사 분장이라도 한 듯 꽃분홍색 니트 곱게 차려 입은 전명자 씨(61세)도 그 중 하나다. ‘한림제책’이라는 제본소를 85년부터 부부가 운영한다.
"여기는 우리처럼 부부가 하는 데가 많아요. 소자본 갖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죠. 거의 가족기업이에요. 우리 집도 아주 바쁠 땐 딸들이 중학생 되고부터는 나와서 같이 거들었어요. 제본한 물량 부수를 세는 일은 어려도 할 수 있잖아요. 부모를 돕다가 가업을 물려받기도 하고요. 엄마 아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다른 집도 그렇고 자식들이 다 착실해요. 잘 컸어요.”
아이들의 일손이 필요할 만큼 바쁘던 때가 있었다. 88년 이후부터 90년대 초반이 인쇄업 전성기였다. 24시간 기계가 돌아갔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일감에 파묻혀서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하지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란다. 지난겨울 혹한만큼이나 인쇄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요즘은 거의 아침 9시에 열어 저녁 7시에 닫는다고 한다. “지금은 일만 있으면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러나 인쇄골목 경기는 죽었어도 인쇄골목 인심은 죽지 않았다. 전씨는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간 이방인들에게 고맙게도 따뜻한 차와 추억을 덥석 내주었다. 누군가는 또 그 마음씀씀이에 끌려 그곳의 낮은 문턱을 넘으리라.
충무로 인쇄골목은 세월 따라 빛깔을 달리하며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 옛날 청춘남녀가 ‘극장 구경’ 다니던 스카라극장과 명보극장은 어디에 있을까. 물감과 붓으로 그린, 자못 비장미가 흐르던 영화간판은 아쉽게도 사라졌다. 대신 고화질의 대형 포스터가 내걸린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원래 충무로 인쇄골목은 영화관과 함께 탄생했다. 일제시대에 을지로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초로 '경성극장', '낭화관', '중앙관' 등이 속속 등장했다. 영화 전단지를 찍기 위한 인쇄소들도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6ㆍ25 전쟁 뒤 인쇄골목의 지도는 장교동 일대로 옮겨갔다. 한지상들이 모여 있던 장교동에 인쇄업체들이 몰려들었고, 을지로 인쇄골목이 성황을 이루자 이웃 동네 충무로까지 넘친 것이다. 2009년 현재 구청에 등록된 업체만 1131개, 3000여 개의 미등록 영세업체와 약 2만 여명의 종사자들이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살고 있다.
35년 째 인쇄소를 운영하는 ‘제일특수인쇄사’ 대표 윤석주 씨(야고보.71). 그의 삶은 인쇄골목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홍대 앞에서 작은 인쇄소를 시작한 윤 씨는 30년 전 을지로2가로 이전했고, 16년 전 이곳 충무로에 터를 잡았다.
“1984년 무렵이죠. 을지로를 재개발한다고 해서 거기에 있던 인쇄업체들이 충무로로 옮겼어요. 한 오백 군데 되려나. 그 후로 인쇄업체가 점점 몰려왔죠. 스티커, 명함, 전단지, 카다로그까지 거의 전부 이 동네에서 해요. 가까이 있으면 편하니까 모이게 된 거죠. 나도 벌써 16년째에요. 인현동1가 41번지에서 10년, 117번지에서 6년 있었으니까.”
더듬더듬 기억의 지층을 내려간 윤 씨는 모든 숫자의 기록을 정확하게 복원해냈다. 예전에는 밀대로 밀어서 1도 2도 인쇄를 했는데 설비가 신형화 되면서 억대를 호가하는 고가의 기계도 생겼다. 그것들이 기쁨 주는 효자다. 어스름 동이 트도록 밤새 돌아가기를 연달아 보름 정도 이어지던 꿀맛처럼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2년 전부터 들이닥친 불황의 여파로 그 때가 더욱 그립지만 “우리 공장은 고맙게도 일이 많은 편”이라고 말한다. 비결은 이렇다.
“상대방이 화가 났을 때 참으면 돼요. 내가 손해 난 듯하면서 져주는 거지. 그러면 그 당시엔 몰라도 나중에 그 사람이 깨닫거든. 몇 달 후에 그 사람이 미안했다고 사과하면 스릴 있지요. 단골이 되고 고객도 소개시켜주고. 뭐든지 성실하게 하면 다 잘 되게끔 돼 있어요.”
인내와 베품의 씨앗도 그러한가 보다. 마음의 길 돌고 돌아 귀한 인연으로 돌아온다. 세월의 풍파를 껴안은 하회탈 같은 웃음이 번진 훈훈한 골목길을 등지고 나오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란 아무데로나 통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