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드걸의시집

하얀 눈 덮어쓰고 / 이오덕


 


자다가 깨어나
생각하니
내가 하얀 눈을 덮어쓴
지붕 밑에서 자고 있었구나.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하얀 세상
건너편 산도 마을의 집들도 길고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작 내가 그 눈 밑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으니!
지붕뿐 아니지,
내가 덮고 있는 이불도
하얀 양털에 하얀 목화로 짠 베다.
이불뿐 아니구나
내가 입은 잠옷도 하얗고
내복도 하얗고
낮이면 추워서 방 안에서도 입고 있는
오리털 겉옷도 새하얀 빛
하얀 것만 입고 덮고 하얀 쌀밥까지 먹고
의사가 권해서 포도당 하얀 가루까지 날마다 먹고
하얀 종이에 글을 쓰고
그러고 보니 이거야말로 전신만신 하얀 것뿐
하얀 것뿐일세.
그렇다면 내 마음은 어떤가?
마땅히 하얗게
눈같이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할
내 마음은?
자다가 깨어나 생각하니
내가 올겨울 내도록
하얀 눈을 덮어쓰고서
자고 먹고 숨쉬고
살아 있었네.
하얀 눈
하느님 선물을
덮어쓰고 있었네. 

-2001. 2. 12. 새벽에 
 

이오덕 시집 <고든박골 가는 길>, 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