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R에서 고병권의 자본론 세미나를 시작했다. 평소에 가졌던 맑스에 대한 존경과 고병권에 대한 신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맑스, 니체, 프로이트,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의 F4. 죽기 전에 사귀어보고 싶은 사상가 오빠들이다. 그리고 나는 고병권이 하는 얘기가 대체로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의 언어가 처음부터 익숙했다. 그렇다면 맑스는 어려워도 고병권이 안내하는 맑스는 잘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맑스와 접속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첫 시간에 맑스에 대해 배웠다. 고병권은 <마르크스평전>(푸른숲)을 읽고 ‘혁명적 삶의 어떤 유형’으로서 칼 맑스의 여러 가지 버전의 초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자본론과 맑스의 관계는 무엇일까.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평소에도 정리해보고 싶던 문제다. 대개 사람들은 저자의 삶이 작품과 일치하기를 바란다. 아내를 잃고 <접시꽃 당신>을 쓴 도종환 시인인이 평생 수절하며 혼자 살기를 바라는 환타지를 갖는 것처럼. 맑스의 경우라면, 자본론의 사상을 토대로 맑스의 삶을 상상하고 요청할 것이다. 그래서 맑스가 욕을 먹었단다. 귀족계급에 대한 선망으로 남작 딸과 결혼했다든가, 고급주택가에 살고, 딸들을 고급 사립학교에 보내는 등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작가와 작품이 꼭 일치해야할까? 니체의 말을 빌자면 “작가란 작품의 선행조건이나 토양에 불과하며, 기껏해야 작품을 성장케 하는 비료나 거름일 뿐”이다. 과일을 즐겁게 향유하는 데 반드시 흙과 거름을 떠올려야하는 것은 아니듯,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잊어버려야 즐거운 향유가 가능하듯, 우리는 작품을 작가의 삶으로 환원하는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고병권은 말한다.
귀족주의. 이때의 ‘귀족’은 어떤 작위나 재산과는 무관한 것이다. “권력과 부를 향해 기어오르는 원숭이들”(니체)로부터 거리를 두는, 그것으로부터 삶을 방어하고자 하는 고상한 태도다. 그러니까 돈에 대한 착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거나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 맑스의 이러한 태도는 돈이 들어오면 언제든지 그대로 다 써버리는 등 일면 무모하고 사려없음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에 예속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돈에 혈안 될 때 돈의 권력이 커지는 법이다. 맑스의 삶에서 돈, 국가, 가족 등 척도에 예속되지 않고 그것을 가뿐히 넘어서는 ‘프롤레타리아 귀족주의’를 살았다.
맑스가 딸들과 함께 한 고백게임에서 그의 귀족주의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불행: 굴복하는 것, 가장 혐오하는 악덕: 노예근성, 제일 좋아하는 미덕: 단순함, 자신의 주요한 특징: 목적의 단일함>
공공연함. 맑스는 내면이 없는 사람. 겉과 속이 같은 토마토같은 사람이다. 혁명가는 지하에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아니다. 대중과 유리된 혁명가가 있을까? 혁명의 언어는 공공연하게 드러나야 한다. 혁명가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생각과 믿음을 모두와 나누는 사람이다. “걱정할 것은 음모의 발각이 아니라 모호성과 폐쇄성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단락을 보자.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를 감추는 일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무력적 전복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국적없음. 혁명은 이질적 구성을 사고하는 것이다. 인터내셔널리즘은 타자를 분명히 규정함으로써 동일성으로 묶는 내셔널리즘과는 정반대다. UN식의 내이션들간의 연대가 아니라, 내이션의 해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내이션을 잃어버린 자들이 모이는 것. 맑스는 국제노동자협회, 즉 인터내셔날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노마드와 하이브리드, 추방 내지 잠입과 다양체의 구성은 맑스의 삶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는 “존재는 많이 하고 소유는 적게 한 인간”(에리히프롬)이었다.
연구자. 혁명가는 언제 서재에 있고 언제 거리에 나서야하는 걸까. 혁명가는 자유자재로 그 흐름을 읽고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맑스는 1852년부터 1864년까지 공적무대로부터 서재로 물러났다. 온통 책과 신문으로 어질러진 서재와 하나되어 살았다. 조바심난 사람처럼 어슬렁거리느라 카펫이 한 줄로 닳아 마치 오솔길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혁명에 쫓겨났다기보다 혁명보다 먼저 뛰어나가려했고, 그것이 혁명적 사상가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원래 연구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먼저 달려가는 행위다. 세계를 더 예민하고 더 민감하게 감각하는 것이 공부다. 맑스는 앞으로 뛰어나간 사람이다.
정리하자면 “혁명적 사상가는 복종과 예속, 한마디로 노예적인 것을 거부하는 자이며, 미래에 대해서 오직 공공연하게 선포된 음모만을 꾸미며, 비판에 있어 그 바닥까지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고, 소유와 소속에서 추방된 자이자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탈주하는 자이고, 삶의 변혁을 쉼 없는 물음의 대상으로 공부의 대상으로 삼는 연구자이다.” (고병권)
이 어찌 혁명적 사상가에게만 해당되는 덕목일까. 굴종의 삶을 떨치고 노예근성을 혐오하며, 소유와 소속에서 탈주하며, 쉼 없이 공부하는 것은 삶을 음미하는 자, 삶의 변혁을 꿈꾸는 자의 태도이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