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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자식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

글을 낭독할 차례가 됐는데 침묵이 흐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온 얼굴로 눈물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다. 잠시 후 그가 청했다. 누가 대신 읽어달라고. 그가 쓴 글에는 “한번 내기 시작한 화는 산불처럼 번져 좀체로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온다고, 그 무렵 네시간마다 깨어 수유하던 나로서는 아이를 공감하기보다 억누르고 명령하는 편이 수월했다”와 같은 문장이 담겼다. 제목은 ‘좋은 엄마’.

글쓰기 합평 시간에 애 키우는 여성 필자의 낭독 중단 사태는 종종 벌어진다. 피로감과 죄책감의 잔가시가 목에 걸려 그렇다. 애한테 짜증 내서, 충분히 못 놀아줘서, 모유를 못 먹여서, 아픈 애 떼어놓고 출근해서 등등.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가책과 한탄의 목록은 언뜻 사소해 보이나 그 사소한 일은 놀랍게도 엄마들을 수시로 심판대에 세운다.

그냥 엄마가 아닌 좋은 엄마를 나도 꿈꿨다. 첫애를 낳곤 베개 대신 육아서를 베고 잤다. 건강 유지, 품성 함양, 학업 증진, 진로 모색까지 좋은 엄마의 책무는 점점 방대해졌고 거기에 매진할수록 자아는 빈곤해졌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지는 증상도 자식을 키우며 얻었다. 아이가 둘로 늘고 이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싶었지만 그때마다 ‘신이 인간을 일일이 돌볼 수 없어서 엄마를 보냈다’ 같은 말을 되새기며 힘을 냈다.

여자로 길러지며 자동 적립된 ‘모성의 언어’가 바닥이 난 게 엄마 십년 차. 때마침 통장도 비어갔다. 아이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식사 제공만 신경 썼다. 그마저도 힘에 부쳤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난 밥만 해주는 엄마니까. 아무리 애써도 불만족스러운 현실이 답답해 글을 썼다. 압력솥에서 김 빼는 심정으로 몸에 쌓인 울화를 뽑아냈다.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정리했다. 내 욕망과 능력을 직면하면서 좋은 엄마라는 허상에서 풀려났고 되는대로 살아갈 용기가 조금씩 생겼다.

우는 엄마들에게서 나를 본다. 누가 우리에게 모성을 가르쳤을까. 얼마 전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읽었다. “실패자들의 군서지”인 감옥을 인생의 학교로 삼은 선생이 써내려간 겸손의 문체와 품격, 힘, 속도를 갖춘 시적인 문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만 보이지 않던 문장이 눈에 들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품이 넓”은 어머니, “태산부동 변함없”는 어머니 같은 부분이다. 1970~80년대 쓴 글로 전형적인 한국형 모성을 재현하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이가 군에 간 21개월도 걱정에 몸이 닳았는데 20년 세월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지 감히 가늠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과거의 나는 이런 글을 보며 대인배 엄마가 ‘누구나’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거의 남성 저자의 책으로, 즉 남자 사람의 관점으로 인생을 배웠다. 어머니의 육체노동을 희생, 헌신, 은혜 같은 큰 말로 추상화하는 가부장제 언어를 공기처럼 흡입하며 여자다움이나 엄마 됨의 자세와 기준을 체득했으리라 짐작된다.

한 젊은 여성은 이런 글을 썼다. (좋은 엄마가 아닌) 엄마가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만 연구되고, 자식이 엄마에게 미치는 영향은 왜 연구되지 않는 거죠? 영화를 보고 엄마에게도 자아가 있음을 알게 됐다는 딸의 문제제기였다. 아, 관점을 바꾸면 질문도 바뀌는구나 실감했다. 엄마들의 글쓰기가 존재 본래의 생기를 잠식하는 모성의 독을 빼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아닌 나를 주어로 놓고 쓰다 보면 죄의식의 분비물인 눈물도 멎는다.


*한겨레 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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