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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은유 읽다 - 나의 두 사람

출산을 앞둔 후배에게 선물을 하려고 신생아 용품 매장에 갔다. 손바닥만 한 턱받이부터 팔뚝만 한 배내옷까지 크기가 앙증맞고, 순백색부터 복숭아 색까지 색감마저 보드라워 넋을 잃고 만지작거리는데 저만치에서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 혼자 가란 말이야? 평생 한 번인데 하루도 못 빼? (…) 오빠 회사 사람만 그렇겠지. 내 주변엔 교육 안 듣는 사람 없어.” 

만삭의 임신부였다. 아마도 예비 부모 출산교육 프로그램에 남편과 함께 가려는 계획이 어그러진 모양이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감각이 달라서 남편이 남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무언가에 깊이 절망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하는 그이와 아이를 낳아 많이 절망하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간 것 같다. 

ⓒ어떤책 제공 김달님씨의 대학 졸업식 사진.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날 처음으로 학사모를 써봤다.

첫아이는 예쁘고 두려운 낯선 생명체다. 꼬물꼬물한 발가락에도 수시로 벅찼지만 작은 충격에도 아이가 소멸할까 봐 무서웠던 나는 남편 출근길에 차를 얻어 타고 친정에서 지내다가 오곤 했다. 돌 이후에는 동네의 또래 엄마들에게 주로 의지했다. 같이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문화센터를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육아는 살림하는 내 몫으로 받아들였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유치원 재롱잔치나 참관수업, 입학식이나 졸업식처럼 꼭 함께했으면 하는 자리에 남편이 부재할 땐, 저 만삭의 여인처럼 복받쳐서 따졌다. 서러워 눈물지었다. 

한 아이가 자라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든, 조부모든, 이웃들이든. 아무도 없으면 자기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는 나와, 그런 나를 다독이는 나. <나의 두 사람>을 쓴 김달님에게 두 사람은 할머니, 할아버지다. 사회적 용어로 ‘조손가정’인 셈인데 조부모 품에서 자란 그 아이가 “나는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본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 있었다”라며 그 고마움을 책으로 기록했다. 

“내가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내 늙은 부모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50의 나이에 다시 시작된 부모의 삶. 두 시간마다 깨는 갓난아기를 제 품에서 키우는 수고로움. 한 아이를 먹고 입히기 위해 되풀이된 돈벌이의 고됨(6쪽).” 

조금 다를 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돼 

<나의 두 사람> 김달님 지음, 어떤책 펴냄

나도 부모에 의해 그렇게 자랐겠고 또 부모가 되어 어떻게 키워냈다. 사람답게,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고 우리는 얼마나 버둥대는가. 그래서 부부가 손잡고 오는 출산교육에 저 홀로 가야 하는 여자는 울컥한다. 비슷한 이유로 친구들의 ‘젊은 부모’가 모여드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달님이는 초조하다. ‘늙은 부모’인 할머니가 오는 것도 싫고, 오지 않는 것도 싫어 심장이 빨리 뛴다. 그 시절을 살아낸 저자는 “열세 살의 초조한 나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족의 풍경을 가지고 산다고. 너 역시 조금 다를 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103쪽).” 

할아버지는 세상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며 저자에게 ‘달님’이란 이름을 주었다. 달님은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훌쩍이는 예비 엄마에게, 곧 태어날 아이에게, 그리고 엄마의 부재로 기죽은 아이에게 나직이 말을 건넨다.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6쪽)”라고. 앞서 말한 대로 평범하게 살기 위해선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 성에 안 차고 서러웠더라도 당신이 크는 동안 “많은 것을 무릅쓰고 온 한 사람이 항상 네 옆에 있었”음을 기억하라고.


*시사인 은유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