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왜 늘 반성할까

[은유칼럼]

북토크 자리에서 한 20대 여성이 질문했다. 친구들과 수다 떨다 보면 남자들 외모 평가를 하게 되는데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지 양심에 찔린다는 거다. 나는 우선 드는 생각을 얘기했다. “이렇게 자기 행동을 객관화하는 분이라면 타인을 대상화할 가능성은 적어 보이는데요.” 이성애자가 이성에게 관심을 갖고 표현하는 행위는 자연스럽다. 다만 허벅지, 가슴, 허리, 다리, 입술 등 ‘신체 부위별’로 쪼개서 사람을 보다 보면 ‘통합적 인격’으로 보지 못하고 사물화하게 된다. 단톡방에서, 술자리에서, 컴퓨터 앞에서 외모 평가를 일삼다가 실제로 만난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성)폭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것이 문제다. 쟁점은 외모 평가 자체라기보다 ‘누가 외모 평가를 하느냐’ ‘그 외모 평가가 무엇을 파생시키느냐’다. 미국에서 총기 사용이 전 국민에게 허용되지만 가해자의 90%는 남성이라는 통계를 일례로 들려주었다. 페미니즘이 외모 평가를 금지하는 매뉴얼이 아니라 어떤 말과 행동이 놓인 상황과 맥락을 다층적 관점으로 헤아리는 공부라고 할 때, 외모 평가라는 행위 자체만 떼어놓고 죄의식을 갖는 건 올바른 접근이 아닐 것이다. 

ⓒ시사IN 신선영

사실, 그날 내가 느낀 문제점은 따로 있었다. 여자도 외모 평가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조차 왜 여자는 반성을 할까 하는 점이다. 여성은 ‘자기 처벌’ 정서에 익숙하다. 아버지들의 경제적·정서적 무능, 가정 폭력에 대해서도 어머니들은 뒤돌아 가슴을 치며 ‘내 팔자다, 잘해주면 돌아온다, 남편 복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도 ‘밤늦게 술자리에 있어서’ ‘여지를 주어서’라며 자기 행실을 먼저 되돌아본다. 외모 평가를 당할 땐 참아도 외모 평가를 행할 땐 가책을 느낀다. 나도 젠더 이슈로 불화를 겪으면 내 언행부터 점검한다. 말이 공손하지 못했나, 너무 민감했나 수없이 자책한다. 

여성의 신체는 거의 자동 반성 모드다. 왜들 그럴까. 남성 지배적 문화에서 여성은 불합리한 상황에 자주 노출된다. 그때마다 시비를 가리고 싸우고 상황을 바꿔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남자는 원래 그런 종족이고 여자는 원래 그렇게 사는 거라고 배웠다. 원래 그런 것을 두고 왜 그런지 뿌리부터 따지자니 어렵고 복잡한데,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건 쉽고 간단하다. 자기반성으로 상황을 무마하고 또 일상을 살아가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왜 여성은 ‘자동 반성 모드’여야 하는가 

홍성수 지음, 어크로스 펴냄

이 같은 여성의 습관적 반성과 침묵으로 다져진 성차별의 역사에 균열이 일고 있다. 여자도 말을 한다. 남자의 외모와 언행을 평가하고 되갚는다. ‘김치녀’라는 공격에 ‘한남충’으로 맞불을 놓는 일명 ‘미러링’이라는 흐름도 생겼다. 이는 후련함과 통쾌함도 주지만 앞서 질문한 여성이 느끼는 것처럼 혼란과 불편도 남긴다. 나도 처음에는 여성들이 구사하는 거침없고 도발적인 말들이 낯설고 어색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러링은 혐오가 목적이라기보다 뒤집어 보여주기 (213쪽)” 위한 수단이다. “여성들의 저항이 중요한 것이지, 미러링이라는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제 반성과 검열의 삶과 작별하고, 욕이 섞여 있든 비논리적이든 울먹이든 막무가내든 말하는 주체의 탄생에 박수칠 때다. “비하적인 혐오 표현에 대해 웃어넘기거나 침묵하지 않고 조목조목 문제점을 따지(222쪽)”는 목소리가 ‘정상’이고 ‘일상’이 되는 현실에 모두가 길들여져야 한다. 섣부른 반성과 침묵으로 복잡한 삶의 문제에서 도망가지 말아야지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