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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혼자 쓰는 에필로그


5년 전 어느 날,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가는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망설이다가 받았는데 00출판사 편집자라고 했다. 위클리 수유너머에 연재하는 '올드걸의 시집'을 책으로 내고 싶다며 혹시 계약된 곳이 있는지 물었다. 수줍고 떨리는 목소리는 어떤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고 들뜨고 부끄러웠다.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을까 의심했다. 그리고 이듬해 책이 나왔다. 나의 첫 산문집 '올드걸의 시집'은 편집자로서 그가 만든 첫 책이기도 했다. 


삼십대초반 비혼여성이었고 오자매의 막내였던 편집자는 한 여자의 생활글에, 불현듯한 울컥함에 누구보다 깊게 감응하고 애정을 가져주었다. 다음해에 결혼한 그에게 문득 문자가 오기도 했다. "결혼생활이 속상할 때마다 선생님 책 읽고 있어요." 그는 퇴사했고 올초에 출판사 회계 담당직원에게 올드걸의 시집 절판 결정을 통보받았다. 책도 해고가 되는가? 뭔가 밀려오는 감정에 복받쳤는데 다행히 절판기념회를 통해 애도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나의 첫 편집자도 자신의 첫 책의 마지막을 함께 해주었다. 


올드걸의 시집은 새로운 출판사를 만났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 절반의 내용을 살렸다. 한쪽 심장을 이식했다. 화사한 핑크에 남색 금장을 박은 세련된 새 책을 보자니, 부잣집에 입양보내 새 원피스 입힌 자식을 보는 것 마냥 마음이 일렁였다. 좋고도 슬펐다. 어제 낮에 편집자에게 전화를 했다. "미진씨, 책이 나왔어요. 보내주고 싶은데..." "선생님, 새책 봤어요. 잘 만들었더라고요. 제가 그때 실력이 더 있었으면 더 잘 만들었을 텐데..." 그는 글쓰기의 최전선이 나왔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만듦새가 좋다며 자기가 더 잘 만들지 못해 미안하다고. 공부 더 많이 해서 나중에 내 책을 더 잘 만들어주겠다고.


고만 미안해했으면 고만 다짐했으면 좋겠다. 올드걸의 시집은, 한 여자의 위태위태했던 슬픔 사태를 가지런히 빼곡하게 가까스로 담아내어 나를 구원해준 책이다. 미진씨가 한편한편 저작권 허락 받아 시를 듬뿍 실어준 덕에, 책에 담긴 시를 읽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는 독자들의 인사도 많이 받았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은 독자들이 올드걸의 시집을 하나둘 찾아읽고 '이 책이 더 좋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올드걸의 시집으로 자기정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후 나의 어떤 글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저 한귀퉁이에서 책상도 없이 식탁에서 글쓰던 내 등을 두드려 말을 들어주고 책으로 묶어주어 존재 정착을 거들어준 미진씨는 내겐 너무 고마운 사람, 귀한 인연이라고 말하고 싶다.